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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레핀의 '가르신'
등록일 :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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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일리야 레핀은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프레볼로드 미하일로비치 가르신은 소설가다. 레핀은 톨스토이, 무소르그스키 등 당대 러시아 예술가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고, 19세기 러시아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대작 그림을 많이 남겼다. 그가 화가가 아니라 사진 작가였다면 그리고 매그넘 같은 게 당시에 있었다면..... 이런 상상도 해본다.

한편 작가 가르신은 1888년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정신질환에 시달렸고,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은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할 때였다. 그의 사망 원인도, 정신질환에 견디다 못해 건물에서 뛰어내려 심한 부상을 당한 일이었다. 그런 가르신에게 독서와 창작은 유일한 위안이었을까? 불안한 두 눈과 책을 잡은 두 손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흥미로운 것은, 잡지 <개벽> 2주년 기념호(1922년 7월)의 특별 부록에 염상섭이 번역한 가르신의 작품 '4일간'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가르신의 처녀작(1877)이기도 하다.)

창간 2주년 기념으로 이른바 '세계걸작명편' 7편을 엄선하여 번역, 수록한 것인데, 현진건이 번역한 고리키의 <가을의 하룻밤>, 방정환이 번역한 아나톨 프랑스의 동화 <호수의 여왕> 등도 함께 실려 있다. 가르신의 작품 가운데 일부가 1910년대에 영어로 번역됐고, 일부 작품은 일본에서도 1910년대 초에 번역됐는데, 염상섭은 일역본을 읽고 번역했을 가능성이 크다. '4일간'은 1913년 2월 일본의 출판사 海外文藝社, 그리고 1920년 12월 曠野社에서 번역, 출간됐다.


이 가운데 해외문예사에서 1913년에 나온 번역본(가르신의 다른 작품 세 편도 함께 번역, 수록)은 작가이자 영문학자, 번역문학가(에드거 앨런 포우 전집을 번역한 것으로도 유명)이며 와세다대 문학부 교수를 지낸 다니자키 세이지(谷崎精二: 1890-1971)가 번역한 것이다. (이 사람은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 潤一郞: 1886-1965)의 동생으로도 유명.) 반면 광야사에서 나온 책의 번역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인물. 그렇다면 염상섭이 다니자키 세이지의 번역본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는 데, 문제는 다니자키 세이지가 러시아에 능통했느냐는 것. 아무래도 영역본에서 번역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보성전문에 재학 중이던 염상섭이 도일하여 게이오대 예과에 입학한 게 1917년(1920년 1월 귀국)이니, 일본 유학 시절에 세이지의 번역본을 통해 가르신을 접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염상섭이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개벽>에 발표한 게 1921년 8월부터 10월까지인데, 그 이전에 가르신의 작품을 읽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가르신의 '4일간'은 그가 1876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당해 후송되었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러시아 문학사로 보자면, 러시아 인텔리의 이상(理想)이 무너지고 농민과 지식계급 사이의 심연을 의식하게 되면서, 작가들도 실의와 환멸에 빠져들 시기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이 시대의 절망적인 기분을 잘 대변하는 작가가 가르신이라는 설명.

'4일간'은 '무익한 희생과 값없는 열망의 테마를 상징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4일간' 일역본 가운데 오래 전에 나온 것들의 제목은 '억병자(臆病者)의 4일간'으로 되어 있는 데, 억병자(오쿠뵤모노)란 겁쟁이를 뜻한다. '겁쟁이의 4일간.') 

책과 예술 ⓒ 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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