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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투:심리학적 이상사회 - 스키너
등록일 : 200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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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는 '자유의지'를 인간본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철저하게 주어진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므로,  '행동 공학'의 조작을 통해 가장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인간의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이상을 갖고 건설한 심리학적 이상사회-'월든 투'(Walden Two)(1948)를 그는 소설 형식으로 제시한다.

스키너 이전에도 수많은 유토피아 이론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과 '월든 투'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전 '유토피아' 들은 '철학적 완전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었을 뿐이지만, '월든 투'는 사회 구성원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이전 유토피아에 대한 추구는 철학적 이상에 얽매어 오류 수정이 불가능해서 자멸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월든 투'는 수정이 얼마든지 가능한 사회이다. 말하자면, '가장 행복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무수한 실험이 가능한 사회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스키너가 말하는 '가장 행복한 사회'란 무엇인가?   '가장 행복한 사회'란 가사일, 육체적, 정신적 중노동같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최대한으로 줄인 사회이다. 스키너는 불필요한 수요를 줄이고 작업을 능률화시킴으로써, 그리고 불합리하게 남아도는 산업 예비군들을 꼭 필요한 수요에 대한 생산에 돌림으로써 노동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지금처럼 사회의 일부 계층만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가능한 사회 성원 전체가 일하게 된다면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전체 노동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월든 투'에서 개개인의 하루 작업 시간은 네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보람 있는 사회'란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회'이다. '월든 투'에서는 누구도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받지 않는다. 누구라도 적성에 맞는 일을 스스로 방해 없이 선택할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보람 있는 사회'란 긴장을 해소하고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사회이다. '월든 투'는 구성원들에게 예술, 체육등 다양한 여가 활동을 제공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스키너는 사람들에게 조건만 만들어 준다면, 당연히 행복해지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넘치게 된다고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실재로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스키너 식의 '보람 있는 사회'를 이루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시민들은 더 게으르게 되었고, 사회 경제 기반은 무너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말기의 비참함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가져왔던 것이다. 스키너는 게으름, 탐욕과 같은 인간 속성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Burrhus Frederic Skinner
(1904∼1990)
 

이에 대하여 스키너는 '월든 투'의 구성원들은 '행동 공학'에 의하여 개조된 새로운 인간이므로, 탐욕이나 게으름 등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반박한다. '월든 투'의 구성원들은 게으름을 피우거나 더 쉬운 작업을 하려고 욕심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장 과정을 통해 이들은 가장 자신에게 맞는 직업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노동 시간 배정 원칙 때문에 이들은 너무 쉬운 일은 오히려 기피하려고 한다. [월든 투]에서는 누구나 하루 4점씩의 노동 점수를 얻어야 한다. 보통 1시간의 노동은 1 점의 가치가 있다. 예컨대. 창문 닦기를 한 시간 하면 1점을 받는다. 무거운 골재를 나른다든지 하는 힘든 일을 하면 한 시간의 2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정원 정리와 같은 쉬운 일은 시간당 0.2점 밖에 받지 못한다. 따라서 쉬운 일을 택하면 노동 시간이 그만큼 더 길어진다. 이와 같은 노동 체계에 의하여 [월든 투]에서는 누구도 쉬운 일만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탐욕도 게으름도 없는 '새로운 인간'들이 탄생할 수 있는가? 이는 '행동 공학'에 입각한 '공동 부양'에 의해 가능하다. 아이들은 출생 직후부터 집단적으로 양육된다. 공동 부양의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이 자신의 정서, 재능에 맞지 않는 부모에 의해 양육됨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없앨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강요하는 부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물론, 이 것이 방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아이들이 부모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예컨대, 정원사, 기술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일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익히게 된다. 기술과 가치를 주입하는 정규 교육과정 없이도, 아이들은 누구의 강제도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교육받고 택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행동공학'에 입각한 공동 부양은 성장기에 감당할 수 없는 좌절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수준으로 통제해 줄 수 있다. 이를 통하여 개개인들은 인성의 왜곡됨이 없이 올곧고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다는 것이다.

'월든 투'는 천여 명 남짓의 소집단이다. 심리학은 통제할 수 있는 피 실험 집단을 통해 얻어진 결과를 실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전체에 적용한다. 마찬가지로 스키너는 실험할 수 있는 사회 -[월든 투]-에서 얻어진 결과를 전체 사회로 확대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스키너는 '월든 투'와 같은 유형의 사회가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월든 투'의 소규모성은 그것 자체로도 이미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월든 투'는 과도한 집중으로 야기되는 현대 도시 문명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통신망이나 교통 시설이 충분히 발달되어 있기에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월든 투' 규모의 소집단이 충분히 기능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월든 투' 규모의 소규모 사회에서는 인구집중, 과도한 경쟁 등에서 야기되는 불필요한 낭비를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월든 투'의 건설,운영 이념인 '행동 공학'은 인간 본연의 가치인 '자유'라는 측면에서 비판될 수 있다. '행동 공학은 '결과'라는 강화물을 통해 인간 행동을 예측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이것은 결국 인간 자유의지를 무시하는 게 아닌가?'

이에 대해 스키너는 우리의 '자유'가 무엇인지 묻는다. 자유란 '하고 싶은 것'을 함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결과물을 주는 것을 '하고 싶어한다'. 행동 공학은 단지 우리에게 '좋은 결과물'을 제시함으로써 행위자가 그 결과물을 얻는 행동을 하도록 '강화'시킬 뿐이다. 그것을 선택하느냐 안 하느냐는 여전히 행위자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행동 공학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월든 투'는 이것이 쓰여졌던 1940년대보다 오늘에 와서 그 의미가 오히려 더 커진 듯하다. 물론 심리학에서 '행동주의'는 쇠퇴 일로에 있다. 그러나 스키너가 공격받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 '인간됨'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주장은 더 이상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듯하다. 인지 과학에서처럼 인간도 하나의 조종할 수 있는 메커니즘으로 보는 견해가 과학 문명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99년의 '월든 투'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과연 인간 사회를 조작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는 곧, 가장 인간다운 사회라고 할 수 있는가? 과학 문명은 물질적, 사회적 조건만 갖추어 진다면 인간은 행복해지리라는 편견을 알게 모르게 갖고 있다.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한 화두를 '월든 투'는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명저산책 ⓒ 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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