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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 스피노자
등록일 : 200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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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리와 윤리학은 다르다

국어사전은 윤리라는 말의 뜻을 이렇게 두 가지로 풀이한다. 1.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 인륜 2. 윤리학의 준말. 한편 윤리학은 '인간 행위의 규범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며, 도덕의 본질, 기원, 발달, 선악의 기준 및 인간 생활과의 관계 등을 탐구한다'고 한다. 윤리학의 준말로 쓰이는 경우를 접어두고 보면, 윤리는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행위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윤리학은 그러한 규범의 근거, 적합성 등을 따져 묻는 학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렇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러이러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규범, 준칙, 행위 기준이 윤리다. 이에 비해서 과연 그런 규범, 준칙, 행위 기준 자체가 정당한 것인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 따위를 묻는 것이 윤리학이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행위 규범이 윤리라면, 윤리학은 당연시되는 행위 규범을 당연시하지 않는 태도에서부터 출발한다.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의 저서 <윤리학>의 라틴어 원제목은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즉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이다. 윤리학을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한다니.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당연시되는 것이 윤리인데 비해서 되물어 나가는 것이 윤리학이라고 한다면,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질서에 따른 증명이라는 방식으로 되묻고자 했던 셈이다.
 

2. 기하학적, 연역적 방법

사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처음 읽는 사람은 이 책이 정말 윤리학 책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서술 방식이 매우 독특하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크게 다음과 같은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신에 대하여,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인간의 예속 혹은 정서의 힘에 대하여, 지성의 능력 혹은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그런데 각 부분은 공리(公理) 혹은 정의(定義)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명제들은 공리와 정리 및 앞선 명제들에 입각하여 증명된다.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말하는 공리는 증명이 필요 없는 자명한 진리로서,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 기본 명제를 뜻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정리 1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으며,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또 파악될 수도 없다.

증명: 앞선 정리 14(신 이외에는 어떤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도 없다)에 의해, 정의 2(실체란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에 의해, 그리고 정의 3(양태란 실체의 변용이며, 다른 것 안에 있으면서 다른 것을 통하여 파악되는 것이다)에 의해, 실체와 양태 이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않는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도 파악될 수도 없다.

스피노자는 자명한 진리에서 출발하여 다른 명제들을 논리적인 귀결에 따라 차례로 이끌어 내는 연역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셈이다. 스피노자가 굳이 그런 방법을 사용한 까닭은, 기하학의 증명 방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해설하는 것이 가장 체계적이고 분명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Benedictus de Spinoza                               스피노자의 반지 문장
                                                              1632 - 1677



 3. 신, 자연, 그리고 실체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과는 무척 다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의 잘못을 심판하고 벌주는 그런 신이 아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은 결코 세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 아니 되어서는 안 된다. 창조자라면 피조물과 구별되어야 한다. 신이 만일 피조물과 구별되는 창조자라면 신은 피창조자에 의해 제한되는 존재, 요컨대 무한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그런데 무한하지 않은 신이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인 신 개념과 어긋난다.

한편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자연, 그러니까 동식물, 산, 강, 바다, 땅, 하늘 등으로 이루어진 자연과 다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은 물론 그런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이상이다. 스피노자는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시키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연과, 영원히 변화하는 자연의 한 순간 순간의 모습으로서의 자연을 구분 지어 말한다. 만물을 낳고 또 낳는 생산적인 자연과, 그렇게 생산된 자연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순간적인 모습으로서의 자연을 구분 짓는 것이다. 우리가 주위에서 접하는 자연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후자의 자연에 속한다.

신과 자연에 대하여 이상과 같이 생각한 스피노자는 신이란 곧 자연이라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본 까닭은 다름 아니라 실체 개념 때문이다. 실체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그 어떤 다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 그러니까 자기 자신만이 자기 자신의 존재 원인이 되는 존재를 뜻한다. 스피노자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과 자연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실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 자연, 실체 등이 도대체 윤리와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언뜻 보면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생각했던 가장 행복한 삶과 신, 실체, 자연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4. 영원의 상 아래에서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삶, 가장 행복한 삶은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하는 삶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 아니라 무한한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은 무한한 자연을 지성을 통해서 파악하고 바라보는 삶을 뜻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삶은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데 몰두하는 과학자의 삶과 비슷해 보인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지한 자는 외적 원인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동요되어 결코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누리기 못하며, 자신과 신과 사물을 거의 인식하지 않고 산다. 이에 비해 현자는 영혼이 흔들리지 않고 신과 사물을 영원한 필연성에 따라 인식하며,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누린다.' (정리 42의 증명 중에서)

보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우리는 몸이 아픈 것을 매우 싫어하고 두려움과 분노의 감정을 느끼기까지 한다. 몸이 피곤하고 아프면 짜증도 쉽게 내고 만사가 귀찮아지지 않던가. 그러나 육체적인 고통이 반드시 자연 안의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 것임을 분명하게 이해한다면, 고통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을 지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그것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피할 길 없는 운명임을 깨닫는다면,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을 스피노자는 '영원의 상(相) 아래에서' 바라본다고 표현한다. 순간적인 기분에 좌우되거나 외부의 일에 흔들리지 않고 무한한 자연의 법칙에 입각하여 모든 일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렇게 하면 종교적인 박해, 정치적인 탄압, 신체의 질병, 경제적 궁핍 등, 어떤 불행 속에서도 마음의 고요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쉬울 리 없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모든 탁월한 것은 매우 드물고, 이루어지기도 힘들다.'

명저산책 ⓒ 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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