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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의 출현 배경
등록일 : 2009-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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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 시대

주나라가 도읍을 호경에서 낙읍으로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 BC 403년, 진(晉)나라의 대부(大夫) 한(韓), 위(魏), 조(趙) 삼씨가 진나라를 분할하여 제후로 독립한 기원전 403년까지를 춘추 시대라 한다. 또한 그 이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시기를 전국 시대라 한다. 춘추와 전국이라는 두 시대로 구분하는 까닭은 혼란의 정도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명목상의 권위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던 시대가 춘추 시대이며, 그 권위가 완전히 무너져 여러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대혼란의 시대가 전국 시대이다.


*봉건 질서의 붕괴에 따른 새로운 경향

봉건 제도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서주 시대까지는 정치적 지배 계층과 문화 담당자들이 대체로 일치했다. 주나라의 천자를 정점으로 천자가 분봉한 제후들과 그 밑의 대부(大夫), 사(士)들이 지배 계층을 이루었고,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제도와 정책을 통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실질적인 힘과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 시대에 들어와 봉건제 질서가 흔들리면서, 구 지배 계층 가운데 신분상의 몰락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정치적 지배력을 상실한 그들은 보다 전문적인 전쟁(武)과 문화(文)의 담당자로 전락해야 했고,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유사(遊士)의 처지가 되기도 했다.


*유세객들의 등장

권력과 문화를 독점적으로 향유하던 처지에서 권력을 상실해버린 구 지배 계층과, 경제적 실력을 바탕으로 새롭게 흥기했으나 아직까지 정치적 지배력을 확고하게 획득하지 못한 신흥 지주 세력 가운데, 전문적인 지식인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러 제후국들이 세력을 다투는 상황 속에서 각 제후국의 권력자들로서도, 전문적인 지식을 활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지식인들은 각지의 권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구상과 포부를 열심히 설명하여 등용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즉 유세객(遊說客)들이기도 했다. 우리가 제자백가라 부르는 고대 중국의 다양한 사상 유파는 대략 춘추 시대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된 유세객에 연원을 두고 있다. 양나라의 혜왕을 만나 인의(仁義)의 중요성을 갈파하는 맹자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유세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자백가의 사상적 과제

그렇다면 유세객들에게 공통되는 사상적인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문제삼은 것은, 작금의 급격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해하는 방식과 그에 대한 대처 방안이었다. 권력자들로서는 어떤 유세객이 보다 정확하게 작금의 변화를 이해하고 보다 유망한 방안을 제시하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유세객들이나 권력자들 모두 자기 시대의 변화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자백가의 특징

여러 제후국들이 난립하는 시대 상황은 일종의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해 주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나름의 식견과 포부를 펼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상의 성격과 내용이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일한 시대 상황에 대한 다양한 인식과 판단이 제자백가의 특징이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지식인들이 가장 폭넓은 사상적 자유를 누렸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단일한 권력에 의해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라면, 사상의 자유는 제한적인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정치적 분열이 다양한 사상의 만개를 가능케 한 조건이 되었던 셈이다. 이를 가리켜 사상의 자유로운 경쟁이 보장되었던 사상의 '자유 시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메모: 그 명맥만을 간신히 유지하던 주나라는 결국 기원전 256년에 진나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했다.

중국사상사 차례보기  > 은에서 동주 시대까지 ⓒ 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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