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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인문주의의 원형, 공자
등록일 : 200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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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의 유민 공자

공자(孔子: 552-479 B.C.)는 몰락한 구 귀족 출신, 즉 실질적인 권력은 없고 문화 전수자의 역할에 만족해야 했던 계층 출신이다. 공자 집안은 본래 송(宋)에서 노(魯)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송나라는 상(商)의 유민들로 이루어진 나라다. 상을 멸망시킨 주 왕조였지만 상의 유민들이 조상들을 제사지내는 것은 허용했으며, 송은 상의 옛 왕들을 제사지내는 나라였다. 송의 주민들은 상의 유민이라는 의식이 각별했다. 상에서 주(周)로 이어지는 일종의 역사적인 의식 혹은 문화적인 계승 의식을 공자가 강하게 지녔던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예 전문가로서의 공자

빈한한 몰락 귀족 집안 출신의 총명한 젊은이 공자는 목장일이나 회계일을 돌보는 처지였다. 그런 처지의 공자는 요즘말로 국비 장학생으로 주나라에 유학하여 예(禮)를 배웠고, 노나라 최고의 예 전문가가 되었다. 이 때의 예는 단순히 예의 범절이나 의례 절차만을 뜻하지 않으며, 주나라 문화의 총체를 뜻하는 말에 가깝다. 공자는 주나라 문화의 총체에 대한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을 보유했고, 그것을 전수, 시행하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미 화석화되어 가는 방대하고 복잡한 주나라의 예를 철저하게 익혀서 전수하는 예 전문가 집단은 오늘날의 산동(山東) 지방, 즉 당시의 노(魯), 송(宋), 추(鄒) 지역에 많았고, 공자는 그 가운데 노나라에서 살았던 예 전문가였던 셈이다. 공자가 한 때 장례를 치러주고 돈을 받는 일을 했다는 이야기도, 예 전문가로서의 공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 공자의 최대의 과제

우리는 공자하면 인(仁)의 가르침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공자하면 예(禮)를 떠올리는 편이 보다 정확하다. 공자는 주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질서가 붕괴되고 대부가 제후를, 제후가 천자를 위협하는 하극상의 시대를 살았다. 공자의 고향 노나라의 경우, 환공(桓公)의 세 후손인 계손 씨, 숙손 씨, 맹손 씨 세 대부 집안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공자는 이런 현실을 바로잡아, 명목상의 군주와 실재의 군주가 일치하고 명목상의 신하와 실재의 신하가 일치하는 세상을 꿈꾸었다. 이른바 이름과 실재가 일치해야 한다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이다.


* 보수주의자, 전통주의자로서의 공자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이름과 실재를 일치시켜야 할까? 공자는 전승되어 온 문화, 즉 예를 기준으로 일치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군주가 진정으로 군주다운지, 신하가 진정으로 신하다운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그들의 언행이 예에 합당한지 아닌지 여부에 있다. 공자는 결국 전통적인 기준에 따라 현재의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는 보수주의적, 전통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 과거의 전통을 바르게 계승할 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 혁신가로서의 공자

공자는 몰락하는 주나라 봉건제 질서를 회복시키고 했던 보수, 복고, 전통주의의 이데올로그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50대의 늦은 나이에 노나라를 떠나 유세에 나섰으나 결국 등용되지 못하고 고국에 돌아온 공자는 제자 양성이 전력한다. 공자 이전에는 문화의 전수에 참여하는 이들이 지배 계급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귀족이나 고급 관료의 자제 이외의 사람들까지 제자로 받아들임으로써, 피지배층 출신이 예에 대한 교육을 통해 문화인,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공자의 교육은 제자들을 군자(君子)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군자는 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공자는 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군자의 자질로 도덕적 인격을 강조했다. 요컨대 혈통적 신분 요소와는 상관없는 별도의 도덕적 자질과 실력이 위정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 현세적 합리주의자로서의 공자

공자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귀신, 운명 따위에 대해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물론 가장 아끼던 제자 안회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라고 탄식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학문적, 공식적 관심 속에서는 하늘에 대한 적극적인 주장을 펼치지 않았고, 그것에 의지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공자의 관심은 사람의 문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문제에 있었을 뿐이다. 물론 공자가 주나라 문화 전통의 핵심 중의 하나인 천명이나 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공자는 모든 것을 천명이나 천도에 의거하여 파악하던 전통과는 어느 정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 인문주의자 혹은 문화주의자로서의 공자

전통 문화의 총체로서의 예를 연구, 정리, 전수하는데 전념한 공자는,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성왕을 도와 섭정을 했던 주공(周公)을 가장 존경했다. 주공은 주나라 봉건제의 기틀을 확립하고 대부분의 문물제도를 이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요컨대 주나라의 문화적 성취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공자는 예에 맞게 적절히 꾸미는 것을 강조했다. 꾸미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문화 이전의 혹은 문화 바깥의 상태이다. 현세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어 전통적인 문화의 법식을 따르고자 했던 공자는 중국 인문주의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주의자로서의 공자의 역할은 그가 노나라의 연대기인 {춘추}를 편찬하고 시, 역, 예 등의 문헌에 관여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문헌 편찬 혹은 정리에서의 공자의 실제 역할은 예로부터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 공자의 영향

공자가 중국 사상과 문화, 더 나아가 동아시아 사상과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고 지속적이다. 공자의 영향력의 지속적이었던 까닭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가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공자가 이상주의자였다고 한다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 사이, 지배 계층 내부의 갈등 관계를 인(仁)에 바탕을 둔 덕치(德治)로 화해시킬 수 있다는 그의 입장은 다분히 이상주의적이다. 이상주의는 현실에서 당장 실현되지는 못해도,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매료시키면서 긴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 이상주의가 지니는 유연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 그것이 바로 공자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메모: 우리가 사용하는 상인(商人)이라는 말은, 패망 이후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던 상족 사람들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설이 있다.


중국사상사 차례보기  > 은에서 동주 시대까지 ⓒ 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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