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갤러리

묵자와 묵협 집단
등록일 : 2009-11-04
트위터로 공유하기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미투데이로 공유하기
예에 입각한 문화주의로서의 공자 및 그의 유교가 지닐 수 있는 폐단은, 외양만을 꾸미는 형식주의로 흐르기 쉽다는 점이다. 그밖에도 공자가 강조한 인(仁)은 덕목은 종법제를 근간으로 하는 주나라의 봉건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어디까지나 차별애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유교의 이러저러한 한계를 비판하고 나선 인물이 바로 묵적(墨翟: 묵자)과 그의 묵협(墨俠) 집단이다.


* 베일에 가려진 묵적의 삶

묵적의 정확한 생몰 연대와 출생지는 알기 힘들다. 대략 송나라에서 태어나 노나라에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으며, 기원전 5세기 전반기에 태어나 기원전 4세기 초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송나라에서 대부로 일한 적이 있으나 생애의 대부분은 추종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유세객으로 보냈다. 한편 묵적 학파의 책인 {묵자}는 한 사람이 한 시대에 집필했다고 보기에는 매우 방대하고 체계적이며, 내용 역시 무척 다양하다. 결국 묵적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시기에 집필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 유가 내부의 비판자

주의할 점은 묵적과 그의 사상을 유가 내부로부터의 자기 성찰과 비판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점이다. 묵적은 유자의 일을 배우고 공자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주나라의 예법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노나라에서 주나라의 여러 예법과 공자의 가르침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묵적이었지만 초기 유가 사상의 한계와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자기 나름의 사상과 실천을 전개했던 것이다.


* 모든 사람을 한결같이 사랑하라

기본적으로 차별애라고 할 수 있는 공자의 인(仁)에 대해 묵적은 만족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게 된다면 약육강식의 경쟁이 사라지고 평화를 구가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묵자는 이러한 겸애 정신에 바탕을 두어 강자의 침략 전쟁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강자의 침략을 실제로 막아내려는 실천에 힘썼다. 각지에서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조직화하여, 일사불란하게 침략 전쟁을 막아냈던 것이다. 묵적을 추종하는 묵협 집단은 성곽의 축조, 수리, 방위 설비와 무기 제작, 실제의 전투 및 구호 활동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강력한 전사(戰士) 집단이었다. 때문에 묵적의 출신 성분을 몰락 귀족의 후예로서 전문적인 기술인, 즉 공장(工匠)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 현자를 숭상하라

{묵자}에서 '현자를 숭상하라'는 주장이 담긴 상현론(尙賢論) 부분은 전국 시대 말기에 가필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되기에, 그 전부가 묵적 자신의 주장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묵적의 겸애설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묵적 사상의 발전 내지는 계승으로 볼 수 있다. 상현론은 인재 등용에서의 겸애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 서민, 심지어 노예라 할지라도 그 능력이 뛰어나다면 관리로 등용해야 마땅하며, 심지어 군주의 자리까지도 그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의 계급 체계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발언이었고, 이에 따라 나중에 순자는 묵적의 가르침을 평하여 '역부지도'(役夫之道), 즉 노동자나 하층민의 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 하늘에 대한 새로운 입장

묵적은 하늘을 모든 것을 주재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규정한다. 사람들이 서로 겸애하면 하늘이 복을 내리지만 다투면 벌을 내린다는 식이다. 요컨대 하늘의 뜻(天志)을 무척이나 중시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전통적인 천 관념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분명 다르다. 우선 묵적이 설정한 하늘의 역할은 봉건 질서 유지의 정당화 논리에 가까운 전통적인 천 관념과는 달리, 신분적, 사회적 평등성을 뒷받침하는데 있다. 또한 묵적은 부귀영화, 길흉화복이 모두 하늘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적인 천 관념을 거부했다. 묵적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고, 그렇게 노력하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 바로 하늘이라고 보았다.


* 공자의 문화주의에 대한 비판

묵적은 예에 바탕을 둔 공자의 문화주의가 형식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이에 따라 그는 모든 문제에서 명(名)보다는 실(實)을 따지라고 한다. 본래의 정신이나 취지, 목적에서 어긋나는 겉치레를 없애고 꼭 필요한 만큼만을 취하는 검약을 강조했던 것이다.


* 묵자 학파의 최후

묵협 집단은 묵적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강대국의 침략에서 약소국을 구해내는데 열심이었지만, 기원전 381년에 초나라 귀족 양성군의 부탁으로 그 영지를 방어하다가 180명 모두가 자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묵적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활약하는 집단이나 개인이 있었지만, 오히려 강대국 편을 들거나 철저한 상명하달의 복종을 강조하거나 하는 등, 묵적의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묵적의 사상적 후계자들은 기원전 3세기 말 진나라의 통일 시기 즈음에 집단적 사상 및 실천 운동의 차원에서는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메모: 묵적의 성인 묵(墨)을 건축이나 설비 제작에서 사용되는 먹금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중국사상사 차례보기  > 은에서 동주 시대까지 ⓒ 표정훈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