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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는 말이 아니다. 공손룡과 혜시
등록일 : 201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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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어의 특성과 중국 사상

중국어는 단어의 문법적인 기능이 문장 중에 놓여진 단어의 위치, 즉 어순에 따라 결정되고, 단어에 고정된 품사가 없으며 위치에 따라 어느 품사로나 자유로이 변할 수 있다. 융통성이 매우 풍부하지만, 논리적인 엄밀성은 떨어지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 사상에서 논리와 언어는 생경한 주제이다. 말로써는 뜻을 이루 다 나타내기 힘들다는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 논변과 추론보다는 체험과 직관을 중시하는 태도 등이 중국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에 대해 오히려 그 신뢰성을 의심하고, 말을 아끼고 다소 어눌해 보이는 사람에 대해 오히려 높은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한 사상 유파들이 경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주장을 널리 알리고 군주를 설득하고자 애쓴 유세객들이 활동한 전국 시대에는, 말의 중요성이 각별했다.

* 인식의 상대성을 지적한 혜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송나라 출신으로 장주와 절친한 친구였던 혜시(惠施)는 보통의 상식을 뛰어 넘는 10사(十事)를 주장했다. {장자} 천하편에 실려 있는 십사 가운데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은 땅과 같이 낮고, 산은 못과 같이 평평하다.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연나라 북쪽과 월나라 남쪽에 있다. 만물을 똑같이 사랑하라. 천지는 하나의 전체이다.
그런데 이러한 십사에는 논증이 딸려 있지 않다. 때문에 이에 대한 후대 학자들의 해설도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혜시가 상식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볼 때 당연한 사항도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보면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다는데 동의한다. 앞서 든 십사의 예로 보면, 높음과 낮음, 과거와 미래, 중심과 주변 등의 인식과 판단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 공손룡의 백마비마론

공손룡(公孫龍: 대략 320-250 B.C.)은 조나라 출신으로 각지를 유세하며 돌아다니다가 조나라의 실력자 평원군의 식객으로 활동했다. 그는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 즉 문자 그대로 백마는 말이 아니라는 논변으로 유명하다. 백마라는 개념의 범위는 말이라는 개념에 비해 좁다. 따라서 '백마는 말이다'라고 하게 되면 좁은 개념과 넓은 개념을 동일시하는 잘못에 빠진다. 결국 '백마는 말이다'라고 하면 틀리다. 또한 말은 형태를 가리키고 백은 색을 가리킨다. 희다는 색을 말하면 형태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백마는 형태 개념과 색 개념을 합친 것이다. 따라서 '백마는 말이다'라고 하면 틀리다. 또한 공손룡은 구체적인 사물과 추상적인 보편자를 분리하여 생각했다. 그는 구체적이며 특수한 사물인 물(物)과 추상적인 보편자 혹은 개념인 지(指)의 다름을 지적했던 것이다.

* 공손룡과 혜시는 궤변론자들인가?

순자는 혜시를 일컬어 "언어에 미혹되어 실재를 알지 못한다"고 평가하고, 상궤를 벗어나는 괴이한 말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혜시나 공손룡의 주장을 보면 순자의 비판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공손룡과 혜시가 언어, 논리, 인식의 문제에 각별히 주목했던 데에는 나름의 뜻이 있었다. 공손룡은 이름과 실재의 관계를 바로잡아 천하를 교화시키고 싶다고 했고, 혜시는 만물을 똑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요컨대 공손룡과 혜시는 언어, 논리, 인식의 문제에 순전히 이론적인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인 작업이 궁극적으로는 천하를 평안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공손룡과 혜시 역시 주나라 봉건 질서의 붕괴와 새로운 질서의 미확립이라는 혼란의 시대를 극복하려 했던 실천적인 지식인들이다. 그들을 단순히 궤변론자라고 치부해버릴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궤변으로 보일 정도로 상식을 뛰어 넘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바로잡기 힘든 세상, 기존의 상식이 이미 무너져 버린 세상. 공손룡과 혜시는 바로 그런 세상을 살았던 인물들이다.

메모: 연나라는 가장 북쪽에, 월나라는 남쪽에 있다. 때문에 혜시의 말은 중앙이라는 위치 개념이 상대적임을 뜻한다.

중국사상사 차례보기  > 은에서 동주 시대까지 ⓒ 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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