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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좋은 삶인가? ┃말에 숨은 그림, 오늘을 되묻는 철학 ①
등록일 : 201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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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설에 따르면 사私란 ‘벼[禾]를 취하고 있는 모양새’를 그린 것으로 ‘개인의 몫으로 돌아가는 벼’ 또는 ‘개인이 벼를 취함’을 나타낸 낱말이다. 여기서 벼는 물론 개인의 (생물학적·문화적) 생존에 필요한 생필품에 대한 상징이다. 私는 그러므로 생필품을 내 것으로 취하는 상태, 달리 말해 생필품이 내게 귀속되는 상태를 함의한다.

이렇게 보면 사私 없는 개인의 생존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일 터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예로부터 이 낱말은 퍽 부정적 뉘앙스를 함유해왔다. 그저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지 않게, 몰래, 제 욕심을 취하려는 개인적 욕망, 공평하지 않음’을, 심지어는 ‘남몰래 사랑함, 간통함’을 이것은 함의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사심私心은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제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이요, 사알私謁은 개인적 만남이 아니라 개인의 이득을 목적으로 비밀리에 높은 직위의 사람을 만남인 것이다. 사애私愛는 개인적으로 사랑함이 아니라 편애 혹은 비밀리에 사랑하는 정인이요, 사지私智는 개인의 지혜가 아니라 한낱 개인의, 공정치 못한 지혜인 것이다.

‘사私’―이것은 오늘날 우리네 삶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낱말 중 하나다. ‘사익私益’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이 단어야말로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가는 이념적 표제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문제적 사태인가? 이러한 경향성을 마치 문제인 양 지적하는 이들에게 사익 추구의 주인공은 이렇게 항변하리라. 나의 사익 추구 행위는 결코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 가족을 위한 것이다. 또 나는 미래에 공동체에 공헌할 마음도 가지고 있다. 가족을 위해 사는 삶이 무엇이 나쁜가! 미래를 준비하며 사는 삶이 무엇이 나쁜가! 그러나 이는 매우 뼈대 부실한 항변이다. 본디 가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 자기애, 모두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사심私心)이란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 그 뿌리에 있는 것은 바로 사심私心이다. 그리고 이 사심에의 매몰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지 않은 듯하다는 모호한 느낌이, 그 느낌의 당자로 하여금 “나도 미래에는 공동체에 공헌할 마음이 있다”는 구차한 말을 자아내는 것이지, 다른 것이 이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는 하나 사심私心이라는 것은 정녕 나쁜 것인가? 앞서 보았듯 사심이란 제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이다. ‘욕심’이란 사전에 따르면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사심은 그러므로 퍽이나 ‘좋지 않은’ 어떤 것이다. 대체 ‘왜’ 이러한 부정적 뉘앙스가 ‘개인의 몫이 개인으로 돌아가는 사태’인 ‘사私’에 들러붙게 된 것일까? 이러한 부정적 뉘앙스의 거대한 울림은 대체 어떻게 탄생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개인’이라는 가치가 억압되었던 특정한 역사 시대의 산물이 아닐까? 달리 말해 공동체의 기율이나 도덕 규범이 개인의 삶의 갈피갈피를 좌지우지하던 시대의 산물이 아닐까? 이를테면 ‘사사롭다’는 말의 뜻은 ‘개인적 범위나 관계의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례에서 드러나듯 私는 때로 거의 ‘개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개인=사私’의 마음의 일부이기도 한, 개인의 생물학적·문화적 생존 욕구는 엄밀히 말해 그러한 욕구를 실제로 실현 가능케 하는 사회 내 권리와 밀접히 연관된다. 개인의 권리, 이것과 이어진 것으로서의 개인의 존엄, 개인의 가치라는 개념은 그러나 언제고 늘 인류에게 자연스럽게 있었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을 전체에 귀속되는 이로 여겼고, 개인의 복된 현세적 삶보다는 도덕적·종교적 이데올로기로 결집되는 공동체 자체를 중시했던 중세적 사유 패러다임과의 사상적 단절을 통해, 동시에 근대 자유 상업주의의 탄생과 발전을 통해, 또 왕정 체제와의 정치적 투쟁을 통해 (서구에서) 역사적으로 성취된 개념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로서의 ‘개인=私’란 개념의 밑바탕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개인의 삶, 그리하여 개인의 행위 선택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공동체 강박적 도덕률의 해체와 이완, (국가의 규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경제적 사익 추구 활동, 근대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성취, 이 세 가지 역사적 운동의 흐름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개인=사私’ 개념은 결코 간단하게 ‘나쁜 것’으로 여겨도 되는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생산 수단의 사私적 소유는 나쁜 것인지 모르지만, 공동체에의 기여 없는 사적 이익의 추구는 나쁜 것인지 모르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물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각자(개인)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권리를 누릴) 자유와 (법 앞의) 평등의 천명(1789년 8월의 천명), 그리고 이 천명이 가정했던 ‘개인 각자의 존엄’이라는 아이디어는, 개인이 개인의 삶의 단위에서 누려 마땅한 자유라는 아이디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에서 ‘私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사적 이익 추구욕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으로서 지녀 마땅한 존엄과 자유를 공동체 내에서 보장받으려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이는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세계의 기저에 삶을 이끄는 구심점으로서 깔려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 세계의 기저에 깔린 마음은 이러한 마음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公의 마음’이기도 하다. 公이라니? 우선 말뜻부터 알아보자. 이것은 사私의 반대어로 만들어진 말이다. 公의 기원에 대한 가설은 여럿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것은 ‘개인됨’의 반대를, 즉 ‘공공적임’을 기호화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가설에 따르면, 이것은 어떤 광장 같은 곳에 신神을 모셔두고 여러 씨족 사람들이 만나고 있는 사태, 혹은 씨족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로서의 광장을 그린 것이다. 후자의 가설이 보다 구체적인 설명인데 어느 쪽이 타당한지는 확실하지 않아 보인다. 그 어느 경우든 公은 애초부터 ‘개인의 이득, 관심, 생존’과 관계있는 사私의 반대어였음이, 즉 ‘여럿의 이득, 관심, 생존’과 관계있는 말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리하여 오늘날 公은 ‘사회적인 것, 드러내놓은 것, 공통의 것, 공적인 것, 공공기구인 국가의 관리’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관리나 친족을 예의로서 부르는 말(당신)’을 지칭하기도 한다. 요컨대 公은 ‘우리 모두의 것’ 혹은 ‘우리 모두에게 속하거나 우리 모두에 해당되는 것’을 함의한다. 하여, 이를테면 공리公理·axiom는 모든 이들에게 통하는 이치 또는 도리를, 공정公正은 공평하고 바름을, 공결公潔은 사사로운 마음 없이 맑음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公의 본디 의미가 만일 광장이라면 그 公이라는 광장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 공동체 전체의 문제·이익에 관심하고자 하는 마음은 보편적이리라. 그러나 왜? 공동의 행사인 기우제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병충해 수해 방지 등을 위해 공동체에 내 작은 힘을 보태고, 나와 남들 여럿이 힘을 모아 땅을 보살피고 모실 때에만 비로소 내게도 ‘내 몫으로 돌아오는 벼[私]’가 있을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 모두는 고래로부터 체득해왔기 때문이다. 마을 공동체 단위의 이런 이야기를 보다 일반화해본다면, 공동의 일의 결정과 이익이 지금 당장의 혹은 미래의 내 개인적 삶에, 내가 사랑하는 내 가족, 내 이웃의 삶에 심중한 영향을 끼치며, 끼칠 수 있음을 우리 모두는 고릿적부터 부지불식간에 알아왔기 때문이다. 이 체득과 알아챔의 역사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보다 길다.

그러하니 우리가 행복한 삶을 누리고자 참으로 원하는 것은 단지 하나가 아님이 자명하다. 그것은 단지 (내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고 공동체 내에서 내 권리를 보장받기를 원하는) 私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공동의 일의 결정에 관여하며 공동 이익에 기여하기를 원하는) 公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둘을 더불어 만족시킬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존재로 살 수 있다. 하여 나의 이익과 더불어 공동체 전체의 이익에 관심하는 일, 사私에의 지향이 공사公事에 조화롭거나 합치되도록 하는 일, 사私에의 지향이 공동체 전체의 결실이 되게끔 하는 일은 사람의 행복 실현을 위해 참으로 중요하다. 나아가 나의 인생이 더 이상 사私라는 구심점이 아니라 공公이라는 구심점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 그리하여 이 구심점에 의한 운동이 저절로 내 몫의 벼 걱정을 없애주고 마는 것―생각건대 이러한 일을 성취하는 이만큼 행복한 이는 따로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최고의 삶’, ‘가장 좋은 삶’일 것이다. 공공적이고자 하는 나의 근본심을 만족시키며, 가장 심원한 행복을 나에 가져다줄 그 삶은 아마도 광장에 투신하는 참여-정치적 삶, 정치에 깊이 관심하고 헌신하는 삶이리라. 바로 이것이 『주역』 산천대축山川大畜 괘의 “대축이정大畜利貞 불가식不家食 길吉 이섭대천利涉大川”(대축은 바르게 함이 이로우며, 집에서 먹지 않으면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바다. 더 높은 행복을 위해서는 사私 지향에서 공公 지향으로 나아가는 일이, 가계 운영을 위한 경제 기계의 일점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적 존재자(시민·정치인)로서도 살아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광장에 참여하는 삶, 정치적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말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러나 아렌트가 지적하듯 이러한 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 ‘좋은 삶’으로서의 정치적 시민의 삶은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삶보다 단지 보다 나은, 보다 고결한 삶만은 아니다. 그들에게 정치적 삶은 사사로운 삶에 하나의 알파로서 추가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사로운 삶의 초월로서만 나타나는 어떤 필연적 결과였다. 그것은 아렌트에 따르면 사사로운 보통의 삶과는 질적으로 ‘다른 삶’인 것이다. 그 삶이 ‘좋은’ 것은 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는 그 삶의 당자가 생존의 필요성을 통어함으로써, 노동과 작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생물학적 생존 충동을 극복함으로써, 더 이상 생물학적 삶의 과정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단지 생계만을 목적으로 사는 이에게는 정치적 광장에의 참여 권리가 아예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오직 그러한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절연시킨 용기 있는 이, 자신의 생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을 정도로 용기 있는 이, 단세포적인 생물학적 생존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이만이 정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렌트가 전하는 그들의 ‘좋은 삶’은 그러므로 어떤 결행과 단절을 요청하는 삶이다. 나아가 그 결행과 단절로 나타나는 자유의 삶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람에게는 뉘에게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얼인 이상, 관계인 이상, ‘열림’인 이상 사람에게 광장에 참여코자 하는 마음(公의 마음)이 보편심이요 근본심인 이상, 생물학적 차원의 생존 욕망의 해결, 사심의 충족만으로만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란 결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우리는 이 참다운 행복에의 열망을 실현할 권리를 얼토당토않게 차단당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를테면 정치 광장에 참여할 길은 우리에게 봉쇄되어, 대개 4년에 한번 투표의 형태로 열릴 뿐인 것이다(약 1,460일 만에 단 1표를 낼 수 있을 뿐인 나는 얼마나 무기력한가! 내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일이 어떤 과정으로 결정되는지 거의 혹은 제대로 알 수도 없고, 그 결정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삶’에 관한 생각은, 지금보다 더 좋은 삶·더 복된 삶으로 정녕 나아가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이러한 삶의 대지, 문화의 대지로부터 ‘이륙’할 용기가 우리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넌지시 일러준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무엇이 ‘이륙’인가? 우리 모두가 다 정치인이 되는 길을 선택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다 정치적 시민으로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한 이로서 새로운 정치를 요구할 수는, 새로운 정치를 실험해보는 길을 함께 모색해볼 수는, 적어도 그 모색을 정치인들에게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는 ‘좋은 삶, 지복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로부터의 자각(깨앎)이, 공공의 일의 결정에 관여하고자 하는 나의 공심과 그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 그 자각에 따라 어제와는 다른 삶을 열 용기가 먼저 필요하다. 달리 말해 무엇이 참으로 내게 좋은 삶인가, 무엇이 참으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삶인가 하는 주제에 관한, 나로부터의 근본적 문제 제기, 궁리, 연구가 먼저 필요하다.  

ⓒ 우석영 <낱말의 우주>


※ 서예작품 출처 : 왕희지(王羲之, 307~365) 중국 동진의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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