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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란 무엇인가: 창조성의 존재론 4┃말에숨은그림, 오늘을되묻는철학 ②
등록일 : 2011-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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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따르면 앞의 것은 창槍·spear을 나타낸다. 뒤의 것은 ‘위의威儀를 지킴’을 나타낸다. 위의란 ‘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하여 이 가설에 따르면 이 낱말의 원형적 뜻은 ‘무위武威를 보이는 것’, 즉 ‘무사로서의 위엄을 보이는 것’이었다. 만일 이 가설이 참이라면 이 낱말은 아마도 고대 중국의 한 풍습으로서의 행사를 지시하던 말이었을 것이다. 무사들의 집단무集團舞로서, 일상이 아닌 여가 시간에 대중들에게 무사들의 훌륭함을 보이는 행사를 지시하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러한 시간은 곧 유희의 시간, 놀이의 시간이었을까? 이 낱말은 오늘날 ‘놀다, 희롱하다(실없이 놀리다), 힘 겨루다, 놀이, 장난, 연기, 연극’ 등의 뜻으로 쓰인다. 힘 겨루기는 실속 있는 행위가 아니며 오직 여가 시간에만 장난으로 해볼 만한 행위라는 점에서, 이 낱말의 핵심은 곧 ‘실없다, 장난하다, 놀다’이겠다. 즉 이 낱말은 삶의 엄숙함, 진지함, 삶의 즉각적 필요와는 무관하게 해보는 행동과 관련된다. 희담戱談은 실없이 해보는 담화이며, 희문戱文은 실없이 잘난 삼아 쓴 글이자 익살로 쓴 글이고, 희언戱言은 익살로 하는 말, 즉 우스갯소리인 것이다. 희완戱玩은 장난으로 가지고 놂이요, 희작戱作은 장난 삼아 지어본 글이며, 유희遊戱는 즐겁게 놀며 장난함(북한말로는 놀음놀이)인 것이다. 장난은 ‘주로 어린아이들이 재미로 하는 짓’이거나 ‘심심풀이 삼아 하는 짓’이다. 요컨대 戱라는 낱말에는 ‘현실 삶의 직접적 필요성과는 관계없는 행위를 하다’는 뜻이 함의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과 무관한 모든 행위가 장난이며 놀이인 것은 아니다. 장난 또는 놀이에는 반드시 ‘재미’ 혹은 ‘즐거움’이라는 요소가 들어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놀이, 장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 시간이 아닌 여가 시간에나 괜히, 실없이, 재미나자고, 즐겁자고 해보는 짓’이다. 놀이play의 연구자 하위징아는 이 중에서 바로 이 ‘재미fun’의 요소야말로 놀이의 에센스라고 말한다.19
하위징아에 따르면 놀이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것이 자유로운 행위이며, 또는 자유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 어떤 물리적 필요, 도덕적 의무에 의해서 우리가 노는 것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과제task가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진정한 놀이는 그에 따르면 절대 자유로서의 놀이인 것이다. 두 번째 놀이의 특성은 그것이 ‘실제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실제의 일상생활, 삶으로부터 일정한 퇴각이며 특별한 시공간에 만들어진 ‘특별한 삶(혹은 행위)’이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삶 아님’으로서의 특별한 삶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말한 바대로 인간의 삶이 만일 인간의 필요need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라면, 하위징아는 놀이야말로 이 삶의 필요로부터의 퇴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위징아에 따르면 놀이는 우리의 나날살이라는 음악에 끼어 있는 ‘간주곡interlude’이다.20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놀이의 성질에 대해서 절반밖에는 말해주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만일 고대 중국에서 戱가 무사의 위엄을 일정하게 보여주는 집단무集團舞였거나 그것과 비슷한 행위였다면, 거기에는 분명 어떤 동작의 기율이 슴배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 기율이 해당 동작의 특정한 풍격風格과 기품氣品과 미美를 창조해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기율은 현대의 모든 놀이에서 기초 원리로 작동하는 규칙rule이며, 그 풍격, 기품, 미는 놀이를 통하여 우리가 추구하는 특정 가치들일 것이다. 놀이를 통하여 우리는 그저 재미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재미 없는 놀이란 놀이가 아니겠지만 재미에 더하여 우리가 놀이로써 추구하는 다른 무언가가 분명 있다. 하위징아는 그 무언가의 실체가 바로 미美라고 말한다. 놀이는 미, 숭고함의 절정체가 될 수도 있는 것으로서21 질서와 더불어 “한계성 속의 완전성”이 된다. 달리 말해 놀이는 “아름다워지려는 경향이 있다”.22 그런 의미에서 놀이는 심미적인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게 하위징아의 입장이다. 심미적 작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성질인 ‘특정 형식을 통한 창조’가 놀이에도 역시 발견된다는 것이다.
사실인즉 아이들의 놀이와 어른들의 창조 사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우리의 창조성은 어린 시절 놀이의 경험으로부터 성숙 배양된 것이며, 어린 시절 놀이의 핵심 가치와 즐거움은 도널드 위니콧이 말하는 것처럼 어른 시절 예술의 그것들로 변형·전화될 뿐이다. 위니콧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은 공감empathy이라는 특별한 기술인데, 이러한 기술을 어른들은 예술을 통해서 계속 반복 학습한다.23 위니콧은 평생 어린아이를 치료하고 상담하는 일을 어린이 연구와 병행했던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타자성otherness를 실험하는데 “타자와의 직접 만남이 흔히 그러한 것보다 덜 위협적인 방식으로” 타자성을 실험한다.24 즉 이러한 실험을 통하여 아이는 (그리고 어른은) 타자와 서로 만나는 법, 대화하는 법, 공감하는 법을 배워간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의 대인 관계 능력 (우정, 사랑, 정치적 능력) 형성에 놀이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놀이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놀이의 가치란 결코 어린 시절에 한정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놀이든 어른이 되어서 하는 (놀이의 승화로서) 창조든 우리가 그것들의 반복 경험을 통해 마음 깊이 기대하게 되는 것은 바로 ‘빼어남’이다. 놀이를 구경할 적에 우리는 놀이에 참가한 이들players의 빼어난 기술prowess를 보고 싶고, 그것을 간접 경험하고 싶다. 놀이에 직접 참가할 때 역시 우리는 그 동안 연마한 어떤 빼어난 기술을 관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놀이는 그러므로 놀이 참가자들players의 빼어난 기술에 대한 시험testing이기도 하다.25 하위징아에 따르면 그러한 놀이는 긴장을 해결하는 과정이기도 한데26 이 빼어난 기술은 바로 이 긴장 해결 기술일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이 빼어난 기술prowess을 놀이에서 기대한단 말인가? 거기에서 우리는 어떤 고상함, 이상理想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삶에서 나타난 긴장을 해결하는 기술을 간접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고상함, 이상이라는 가치의 확인 없이, 긴장 해결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놀이는 우리 모두에게 삶의 본원적 필요로서 인식된다. 그것은 생존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없어서는 안 되는 삶의 필수 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놀이는 이상적인 빼어난 기술의 전시이며 긴장 해결 기술의 전시인 동시에, 기성성을 초월하고 기성의 결정된 질서를 깨트리려는 정신의 용출 과정이기도 하다. 놀이는 “정신의 용출이 우주의 절대적 결정 상태를 깨트릴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놀이의 존재 자체가 인간적 사태의 논리 초월적 성격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27 달리 말하면 더욱 고상한 것, 더욱 이상적인 것을 향한 정신의 기성성 초월 움직임을, 모든 창조 과정에 깃들어 있는 본원적 초월성을, 놀이라는 놀라운 사건은 보여준다. 놀이는 기성의 놀이 기술에 화합하면서도 그 기술을 넘어서려는 몸짓을 허용하고 권장한다. 놀이는 규칙이라는 한계성의 틀 내에서 창조 에너지의 자유 분방한 용출을 허용한다. 놀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규칙에의 순종을 통한 자유로운 기술·에너지 표출이라는 역설이다.



<무동>, 김홍도, 종이에 엷은 색, 39.7×26.7cm, 국립부여박물관소장. 
  

놀이하는 이player가 그 기술·에너지의 임자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이가 놀이의 궁극적 생산 주체가 아님이 지적되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가다머처럼 놀이play 그 자체가 놀이의 주체이고, 놀이의 참가자player는 놀이 속에서 실존적 개성을 지닌 한 인격적 존재자이자 일상 행위의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오직 놀이에만 온몸으로 봉사하는 특별한 존재자로 탈바꿈된다고 말해야 한다. 하위징아에 따르면 놀이는 비밀스러운 분위기와 더불어 그 자신을 감싸길 좋아한다. 또 그는 이러한 비밀스럽고 특별한 행위로서의 놀이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의상이라고 말한다.28 제의나 축제가 놀이의 일종이고 놀이의 원리를 구현한 행사임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행사 참가자들players이 의상을 통해서 자신을 보통 존재자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자임을 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별한 옷을 입은 이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다른 존재자’로 인식되기 마련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무당이나 무희는 특별한 의상을 입어왔던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존재 탈바꿈’을 함의한다. 탈을 쓴 이, 특별 의상을 입은 이는 이제 일상의 존재자가 아니며, 그이는 놀이(제의, 페스티벌, 경기, 게임)에 자신을 봉사하는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놀이의 실질적 주체는 놀이하는 이들이 아니요, 놀이하는 이들은 오히려 놀이의 주체 그 자체인 놀이에 봉사하는 이들이라는 것.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것은 창조와 창조성의 비밀을 말해주는 것은 아닌가? 창조는 사람을 통해서 발생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나 이 창조의 실질적 주체는, 엄밀히 말해서 언뜻 보기에 창조물을 만들어낸 사람 개인(작가, 예술가)이 아니다. 작품 창조의 기원은 절대 그 개인에게만 귀속될 수 없다. 그 기원이 개인에게 철저히 귀속된다는 아이디어, 그리하여 그 개인 창작자를 마치 신(창조주)처럼 생각하는 아이디어는 순전히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아이디어로, 이러한 생각은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것이다. 19세기에는 자본주의 기계 물질 문명의 압도적인 사회 잠식 속에서 인간의 신성한 존엄성을 여전히 담지한다고 여길 수 있는 존재자가 필요했다. 19세기 사람들에게는 산업주의라는 문명의 괴물에 대항해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보여준다고 생각될 수 있는 ‘시적 천재’라는 관념이 필요했다.29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천재 예술가라는 상상 이미지imaginary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이미지가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더는 그러한 시대여서는 안 된다. (천재라는 상상 이미지를 판매해야 먹고살 수 있는 집단에게 이 이미지는 필요하겠지만) 특정 천재만이 창조성을 누릴 수 있다는 19세기의 상상 이미지는 폐기되어야 한다. 그 대신 만인이 창조성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인식되고 천명되어야 한다.
놀이의 실질 주체가 놀이의 참가자가 아니라는 말은 또한, 창조할 때 창조하는 이는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한 채 그 상실 속에서만 창조물을 세계에 나타나게 할 수 있음을 함의한다. 빼어난 기술의 전시 공간이자 즐거움과 신명의 체험 공간인 놀이는 오로지 놀이 참가자인 내가 나를 통히 잊고 놀이의 규칙에만 몰입할 때, 나 자신의 개성의 무화無化 속에서 놀이에 귀속되고 놀이와 한몸이 될 때, 놀이 기술이 시키는 대로만 내가 움직일 때, 내가 놀이 기술에 철저히 복종하는 시자侍者가 될 때, 내게 그러한 전시·체험 공간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은 아르헨티나 축구 팀의 감독이 된 옛 축구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가 다섯 명의 수비수를 제치고 골문 앞까지 빼어난 드리블 솜씨로 전진했을 때―그때의 마라도나는 특정한 개성의 담지자인 개인 마라도나가 아니라 축구 선수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빼어난 기술prowess을 그 모든 잠재적 놀이를 하는 이들(우리 전체)에게 전시한 ‘전시자’이자 놀이에 완연히 귀속된 채 이상적이라고 가정되는 놀이의 규칙과 완전히 일체가 된 ‘놀이하는 몸’, 그리하여 ‘이상적인 몸’, 놀이에 자신을 ‘봉사하는 몸’인 것이다. 즉 그는 ‘보이면 좋을 이상적이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게 된 이인데,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축구장 그라운드라는 놀이의 공간에서 자신을 몰-개성화, 탈-주체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몰-개성화, 탈-주체화가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도록 한 직접적 뿌리는 아니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의 발생은 몰-개성화와 탈-주체화를 반드시 수반한다. 그 신들린 드리블은 분명 마라도나라는 특정 개인이 한 것이지만, 그러한 마라도나 개인이 보여준 빼어난 기술prowess을 빼어난 기술로 인정하는 사태의 근본 뿌리는 우주에 단 하나뿐인 천재 마라도나의 천재성이 아니요, 축구라는 놀이를 하는(할 수 있는), 마라도나와 어슷비슷한 몸과 잠재 능력을 지닌 그 모든 이들, 그 모든 아마추어(애호가)들의 창조적 잠재성인 것이다. 아마추어인 우리들이 없다면 그의 빼어난 기술은 아무러한 가치도 없는 것이다. 빼어난 기술을 보여주는 마라도나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심미적 공동 규칙에 합일한 이, 자신의 주체성을 잊고 그 공동 규칙에만 합일한 이인 것이다. 지금 드리블 중인 그는 우주에 하나뿐인 단독자, 개성적 존재로서의 마라도나라기보다는 그 모든 축구 애호가, 우리들 중의 한 명으로서 축구 유희 삼매에 빠져 있는 이, 놀이하고 있는 이, 하여 우리에게 그 놀이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이,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는 이, 그리하여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다고 말해질 수 없는 특이한 존재가 되어버린 이, ‘나 없는 상태’의 주인공으로서의 마라도나인 것이다. 내가 그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단지 그가 빼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상태의 자유경을 내가 그의 몸짓에서 발견하기 때문이요, 되었으면 하는 나와 현재의 그를 내가 도저히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오직 규칙에 합일한 채 ‘나 없음의 존재 상태’에 머물고 있는 이, 그러면서 작품 창작(빼어난 기술 전시)이라는 희열喜悅을 경험하고 있는 이, 그러나 집단 칼춤을 추며 그렇게 하는 이들을 우리는 낱말 戱에서 보는 것이 아닌가? 애써 키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거기에서 춤 솜씨자랑을 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오래된 戱라는 전통의 맥락에서가 아니겠는가?


19
요한 하위징아, Homo Ludens, 2~3면.
20 요한 하위징아, 앞의 책, 8~9면.
21 요한 하위징아, 앞의 책, 8면.
22 요한 하위징아, 앞의 책, 9면.
23 마사 누스바움,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2010, 101면.
24 마사 누스바움, 앞의 책, 99면.
25 요한 하위징아, 위의 책, 10~11면.
26 요한 하위징아, 위의 책, 10~11면.
27 요한 하위징아, 위의 책, 3~4면.
28 요한 하위징아, 위의 책, 12~13면.
29 이사야 벌린, The Roots of Romanticism, 1999.


ⓒ 우석영 <낱말의 우주>

※ 서예작품 출처 : 미불(米芾, 1051~1107) 중국 북송 시대의 학자이자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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