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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등록일 :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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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은 왜 사는가?

세상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호기심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정리하고, 기록했다. 동식물은 물론, 해와 달, 별, 땅, 그 어느 것도 그의 호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대 제일의 박식함으로 유명해진 그는 왕의 스승으로 일하기도 했다. 마케도니아의 작은 도시 스타게이로스에서 기원전 384년에 태어난 그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의 호기심은 인간의 삶과 행복에 대해서도 여전했다.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탐구의 결과가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이 책은 역사상 최초의 윤리학 도서로도 일컬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원 뤼케이온을 열어 강의할 때의 강의 원고이기도 하다. 니코마코스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 니코마코스가 편집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사는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간단하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 요컨대 인간의 삶의 최종적인 목적이자 선은 다름 아닌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플라톤이 말하는 선의 이데아와는 달리,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선이기도 하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현실 세계 바깥에 있는 완전무결한 이상(理想)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선과 행복을 다루고자 한다.




2. 덕과 중용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으로서의 행복을 '완전한 덕에 따르는 마음의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덕을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구분한다.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기며, 지적인 덕은 교육에 의해 발생하거나 성장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주로 도덕적인 덕에 대해 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덕은 결국 중용을 그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모든 행위와 모든 정념에 중용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악의, 질투, 절도, 살인 같은 경우에는 그 중용이란 도무지 없으며, 그 자체가 나쁜 것이다. 요컨대 언제나 그릇된 것이다. 이에 비해서 절제와 용기는 그 극단적인 것이 중간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과도와 부족이 도무지 없다. 요컨대 절제와 용기는 그 자체가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과 중용에 대한 위와 같은 일반적인 언급을 개별적인 사실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란 어디까지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경우에 관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몇몇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명예와 불명예에 관해 말하면, 그 중용은 긍지요, 그 과도는 이른바 허영이요, 그 부족은 비굴이다. 노여움에 관해 말하면, 그 중용은 온화요, 그 과도는 성급함이며, 그 부족은 성질 없음이다. 진리의 중용은 진실이요, 그 과도는 허풍이며, 그 부족은 거짓 겸손이다. 돈을 주고받는 일에서 중용은 너그러움이며, 그 부족은 인색함이고 그 과도는 방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용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뜻하지 않은 우연이나 일시적 충동에 의해 중용에 맞게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성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에 젖은 행동의 습관이라고 이야기한다. 일시적, 우연적으로 중용에 맞게 행동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항구적일 수 없다. 시종일관 중용에 맞는 행동, 즉 유덕한 행동을 거듭함으로써 우리는 덕의 습관, 중용의 습관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인격이란 오랜 세월에 걸친 일관된 도덕적 훈련과 그로 인한 습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격자란 모든 행동에서 자신이 형성한 중용의 습관에 맞추어 신뢰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하나의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가 전 생활의 모든 행동에서 중용을 지키지 않는 한, 그 사람을 유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봄이 되는 것이 아니며, 하루의 실천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3. 지적인 덕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적인 덕은 꾸준한 가르침과 성찰에 따라 체득할 수 있다. 그리고 성찰의 대상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예를 들어 자기 집안 일의 여러 일에 대비하고 배려하는 사려일 수도 있고, 국가를 다스리는 경륜일 수도 있다. 또한 자연과 우주의 근본적인 원리를 사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성찰의 대상이 크면 클수록 그에 따른 우리의 지적인 덕의 정도도 보다 크고 훌륭하다. 예를 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 같은 것은 경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수단이다. 이에 비해서 순수한 사색적 생활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실천적인 지식은 어떤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 지식이다. 유용성으로서의 지식, 기술로서의 지식인 셈이다. 이에 비해서 순수한 사색으로서의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일 뿐, 그 어떤 다른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예컨대 우주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애쓰는 천문학자가 한 사람 있다고 하자. 그는 천문학 지식을 통해 무언가 다른 목적을 이루려하기 보다는, 앎 그 자체를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 천문학자는 순수한 사색적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탁월한 지적인 덕을 갖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라고 보았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인 지식을 낮추어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실천적인 지식 없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윤리적인 덕 없이는 실천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없다." 요컨대 실천적인 지식은 순수한 사색적 지식에는 못 미치지만,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지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적인 덕을 논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윤리학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 혹은 도덕적인 규범에 대한 논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보다는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조건, 더 나아가 인간이 삶에서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일에 가깝다.

명저산책 ⓒ 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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