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부처님 오신 날에 만난 솔방울들
등록일:2017-05-11, 조회수:270
일생의 일상: 책, 영화, 연극, 생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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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특이한 풍광도 많지만 이런 풍관에 어울리게 특이한 이름도 많다. 제주를 대표하는 오름의 이름만 몇 개 나열해도 입안이 복잡해진다. 우리말이 그만큼 풍성해지는 것도 같다. 제주에서 유명하다는 흑돼지 오겹살을 구워서 씹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쫄깃한 맛이다. 제주시 성산읍 수산리에 있는 궁대악(弓帶岳)은 이름만 가지고는 오름이라는 것을 잘 모르겠지만 엄연한 오름이다. 오름의 허리 부분이 마치 활 모양의 띠가 둘러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서 명칭이 유래했다고 한다. 궁대악, 궁대악, 궁대악.

지난 초파일, 궁대악 오름에 올랐다. 날이 날이니만큼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새기며능선을 걸었다. 오늘 우리가 찾는 건 새우난초. 특이한 지형과 특이한 이름에 걸맞게 궁대악 사면 곳곳에 새우난초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느 곳에는 한라새우난초도 있다. 새우난초는 풍성했다. 이 두꺼운 흙을 뚫고 어찌 이리도 곱게 올라왔는가. 색상이 다른 특이한 새우난초도 실컷 보았다.



인적 드문 오름의 산비탈에는 몇 년 치의 낙엽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간 아무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은 듯 오름의 피부가 아주 건조했다. 바짝 마른 산은 그간의 적폐를 털어내는 듯 낙엽을 밟을 때마다 기쁨을 아는 듯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눈은 눈대로, 발은 발대로 포식을 하면서 오른 궁대악 정상.

호젓한 오솔길이었다. 따가운 햇살을 받아 소나무 그림자가 내려 앉고 그 사이로 내 그림자가 낑겨 있다. 문득 이 고요한 숲에서 그림자들끼리는 뭔가 내통하지 않을까 하는 궁리가 일어났다. 이 세상의 배후는 어딜까, 하는 궁금증도 솟아났다.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더욱 그랬던 것일까.

우람한 소나무 사이로 밑동만 남은 흔적이 보였다. 나이테가 선명한 곳에 관리번호가 붙어 있다. 아마도 고약한 전염병인 재선충에 걸린 소나무들을 처치한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붉게 칠한 페인트는 소나무가 흘린 피인 듯! 그리고 아무는 없는 야단법석(野壇法席)의 낙엽 사이를 휘저으며 부지런히 오가는 수행자들이 있다. 눈매는 형형하고 몸매는 홀쭉하였다. 검은 가사장삼을 걸친 가난한 개미들!



포행이라도 하는가. 탁발이라도 나가는가. 일군의 검은 수행자들이 낙엽 밑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소나무가 흔들리고, 나무가 흔들리자 그림자도 따라 흔들렸다. 얇은 구름, 두터운 구름에 따라 햇빛의 세기가 달라 그림자는 짙고 옅기를 되풀이 했다. 간간이 새들이 청랑하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했다. 살아 있음의 각별함을 새삼 느꼈다. 바람이 불어 피부를 건들고, 햇살이 찾아와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새소리가 둥지처럼 귓구멍을 찾아드는 것. 이 모두가 살아있는 동안 챙길 수 있는 복락이리라.

.....피곤과 그 어떤 희열이 차오르는 순간, 지쳐 누운 그림자를 데리고 이 고요한 현장을 떠나려고 할 때였다. 이곳에 짧게 머무는 동안 내 시선에서 비켜나 있던 것이 불쑥 마음을 때리고 들어왔다. 그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솔방울이었다.

바람에 날리는 송화가루를 포착해서 수정을 하여 열매로 자라난 솔방울. 겨드랑이마다 솔씨를 간직하느라 입을 앙다문 듯 야무지게 똘방똘방하던 솔방울. 이제 솔방울은 나무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가 아래로 내려왔다. 저에게 가장 낮은 곳이었다. 어미 잃은 송아지처럼 잘려나간 그루터기 옆에서 솔방울은 서성거리고 있었다. 꼭 품고 있던 씨앗들은 모두 배출하고 활짝 벌어진 솔방울들의 저 활연대오(豁然大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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