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마곡사에서 만난 불목하니, 아니 불모
등록일:2017-05-16, 조회수:243
일생의 일상: 책, 영화, 연극, 생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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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가는 길이다. 평일의 한낮은 햇살도 다르다. 보통 때라면 그저 나를 가능케 했던 것에 불과한 햇빛이었다. 요일을 달리 하고 보니 평범했던 햇살이 가파른 파장으로 변해서 전혀 다른 각도로 가슴을 찔러 들어온다. 꽃이야말로 햇빛의 아들. 그 꽃을 몰랐다면 그냥 범상히 지나칠 길이었겠지만 이젠 전혀 다르다. 이젠 산의 가파름도 그저 한낮 자그마한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꽃이 있다 싶으면 고개를 숙이고, 저기에 무엇이 있다 싶으면 저기에 후다닥 뛰어갔다 와야 한다.

부처님 오신 날을 며칠 앞둔 마곡사. 모처럼 궁리출판 직원들과 함께 야유회를 나왔다. 절로 가는 길 입구에 연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둥글게 휘어져가는 넓은 길이 부처님의 찾는 신자들로 가득하다. 어디에서 누구하고 살든 사람들의 마음은 부처님을 향해서 둥글게 휘어져 있는가 보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이면 이렇게 절을 찾는 것. 공주를 대표하는 이 절에 오면 두 사람 생각이 난다. 

우선 겨레의 사표이신 백범 김구 선생님이다. 황해도 출신의 백범(白凡)과 충남 공주의 마곡사하고는 이런 사연이 있다. 1896년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 당시 18세의 백범은 그 분노를 참지 못했다. 일본군 장교를 주먹으로 때려 처단한 후, 인천 형무소에서 옥살이 중 탈옥, 마곡사에 몸을 숨겼다. 이때 머리를 깎고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하였다. 광복 후, 마곡사를 방문하여 그때를 회상하며 향나무 한 그루를 심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나하고 희미하고도 직접적인 사연이 있다. 그이도 나처럼 그리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나에겐 일생의 친구라 할 만한 벗이 있다. 대학교에서 처음 만났고 군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가 사회에서 또다시 만났다. 그 친구의 고향이 공주다. 대학 졸업하고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공주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던 그 친구 아버님의 회갑연이 열렸다. 제약업에 종사하는 한 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처음 가보는 공주였다. 마침 시간이 남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그때 마곡사를 찾았었다.

하루살이처럼 그저 하루하루 살기에 급급했던 시절. 손에서 책은 놓은 지 이미 오래 되었고 호프집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시절. 속세를 벗어나 수행도량에 왔다지만 마음은 메마를 대로 말라 별다른 감흥 없이 해탈문, 사천문, 명부전 등 절간의 시설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곡사는 이 지역의 유명한 절이라 어느 때고 웬만한 관광객이 들끓었다. 제법 흥청거리는 분위기의 일군의 관광객들 사이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인물을 만났다.



그는 울긋불긋 차려입고 양산을 받쳐 든 요염한 여인네가 아니었다.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구석을 누비며 폼을 잡는 남정네도 아니었다. 부모를 따라 내키지 않는 여행을 온 여드름투성이의 청소년도 아니었다. 그는 게으른 시간을 관리하지 못해 어슬렁거리는 중생들 사이에 분명히 자신의 할 일을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그는 세상의 요란한 색상을 놓아버린 잿빛 옷을 입고 피둥피둥 살집이 오른 스님도 아니었다. 그는 지게를 지고 있었다. 마곡사 뒷산에서 나무 한 짐이라도 하고 막 내려온 참일까.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고 어깨에는 약간의 검불이 묻어 있었다. 뒷짐을 지고 가는 어느 스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가. 그는 많은 중생들 사이에서 전혀 다른 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퍼뜩 마주한 얼굴이 조금은 난감했다. 

얼굴이 기이할 정도였다. 이목구비의 대칭이 심하게 불균형이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자면, 아, 이런 표현을 용서해주시기를, 기형이라 할 만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특히 한쪽 눈이 귀 가까이로 쏠려 있었다. 그 와중에도 보통 부리부리한 게 아니었던 그이의 눈. 보통사람들과 사뭇 다른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땐 든 생각이 지금도 선명하다. 

명동에서 그이를 만났다면 나는 도리질을 쳤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잘난 행인들이 그를 외면했을 것이다. 철모르는 아이라면 틀림없이 그이한테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심보 고약한 이라면 대놓고 그를 무시했을 것이다.

나 또한 잘난 맛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진 행인 중의 일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는 나에게 그이는 그 어떤 울타리 바깥의 존재였다. 그래서 그리 했기에 이런 생각이 사무치게 들었던 것이었다. 아아, 마곡사라서 그는 이 마곡사를 찾았고, 마곡사이니깐 저런 분을 거두어 주시는구나!

그러고는 그만이었다. 그는 스님의 뒤를 따라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된 작은 요사채로 들어갔다. 거기에서는 또 거기에서 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수행 중인 스님들의 뒷바라지를 그는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님이 편하려면 그는 어쩐지 편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다리를 건너 심검당, 대웅보전을 기웃거리다가 절을 떠났다. 그리고 시외버스를 타고 친구네 아버님 회갑연에 참석했다.

공주에서 자리 잡은 뒤, 사적으로는 남자 4형제를 어엿하게 길러내고, 공적으로는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선생님. 그 곁을 지키며 선생님을 뒷바라지한 어머님. 곱게 차린 두 분을 기리는 자리는 흥이 넘쳤다. 나도 나중 저런 잔치의 자리를 받을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런 분에 넘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간단한 식순에 따라 회갑연은 아담한 한식당에서 진행되었다. 흰 종이를 깐 식탁에 나도 꼽싸리 낑겨 맥주와 소주를 짬뽕으로 많이 마셨다. 천년의 도시, 공주. 백제의 한이 곱게 서려 있는 공주의 한우 불고기는 보통 맛이 아니었다. 근데 이상했다. 취기가 오를수록 마곡사 앞마당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얼핏 보았던 그분의 기이한 모습이, 얼굴이, 부리부리한 눈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겠는가. 나는 낮술에 대취했다.



......... 세월이 흘렀다. 한 가지 생각을 한다는 건 정녕 어려운 일이다. 해탈이나, 초월이니 하는 게 사실 어쩌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건 한 가지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늘 한 가지 생각을 한다는 것, 그게 초월이고 해탈이다. 쉬운 건 가까이에 있는 법이다. 어디 함 해보시라, 오로지 한 생각만을!

온갖 잡다한 일과 생각 중에서 이런 경우가 가끔 있었다. 고향을 가다가 천안-논산 고속도로를 지나칠 때가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백제의 영광, 무령왕릉의 찬란을 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아직 든든히 자리를 지키는, 나를 회갑연에 초대해 주셨든 부모님을 둔 벗과 소주를 홀짝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친구의 넓은 얼굴 가운데로 공주가 나타나고, 마곡사가 떠오르고, 그 소슬한 앞마당이 펼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잠시 마주쳤던 그 기이한 용모의 그분 생각이 주르륵 열렸다.

‘불목하니’라는 말을 아시는가. 나는 이 단어를 이윤기의 자전적 소설인 <하늘의 문>에서 배웠다. 자신의 체험이 짙게 녹아든 소설은 작가가 두루 섭렵한 교양체험이 짙게 녹아 있기도 하다. 작가는 어느 시기 절에서 은거하는데 이때 불목하니란 말이 나온다. 나 역시 불교에 심취하던 시절이라 그 단어가 머리에 콱 박혔더랬다.

위키디피아에 따르면 그 뜻은 이렇다. “숙종 시기를 전후한 조선 시대 중기부터 대한제국멸망 이후의 일제 강점기 조선시대와 8·15 광복 직후 시기까지 사찰에서 땔나무를 베고 물을 긷는 사내 종노를 뜻하였던 한국 고유의 불교 전통적 직업이다. 이 직업은 6·25 한국 동란 직전 시기까지 한반도의 사찰에서는 흔히 있었던 직업이다.”

옛날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마다 소사라는 분이 있었다. 사무보조가 아니라 학교의 이런저런 잡무와 잡사를 담당하고 수리하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분이었다. 절에서도 이런 직책이 있다. 짐작컨대 절에서의 불목하니는 학교에서의 소사에 해당하는 직업인 것 같았다. 마곡사에서 만난 그때 그분이 이를테면 마곡사의 불목하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소설을 읽는 동안 했었다.

오랜만에 본 마곡사는 퍽 많이 달랐지만 또한 옛 정취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때 그 불목하니를 만났던 곳을 지나, 다리를 건너자 심검당이 나왔다. 널찍한 마당에 큰 느티나무. 재주가 있어 저 나무의 잎을 들춰본다면 그때의 내 모습이 저 잎사귀에 녹화되어 있을 지도 모를 일이겠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문명에서 그 기술은 요원하다. 그저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왓장에 이름을 적고 공덕을 비는 곳을 지나자 백범이 은거하였던 백범당이 나왔다. 사진으로만 남은 백범. 너는 무엇하고 사느냐, 너는 사는 값은 하고 사느냐, 묻는 것 같았다. 백범당 옆 백범이 심었다는 향나무를 만지고 지나면 ‘백범 명상의 길’이 나온다. 그 길의 한 구비를 돌아들었을 때 야트막한 언덕위에 일군의 탑들이 보였다. 마곡사가 배출한 고승의 부도탑이려니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느 절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이른바 마곡사 불모비림(麻谷寺 佛母碑林). 그 설명문에 적혀 있기를. 



“예로부터 사찰에 불화를 제작하고 불상조각을 하는 사람이나 사찰건축물을 장엄(莊嚴)한 단청을 시공하는 사람을 불모(佛母)라고 일컬어 왔다. 이들 불모들은 시종일관 지극한 신앙심으로 불사에 임하여 부처의 세계를 장엄한 예술로 승화시키는 구도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남긴 많은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사찰에서 성보(聖寶)로 경배되고 있으며, 국가적으로 소중한 문화재로 인정받고 있어 평생을 지고지순한 신심으로 불사에 임했던 불모들의 혼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근대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 이러한 불모를 양성하는 사찰이 있었고 여기에서 많은 불모들이 배출되어 그 맥을 이어 왔다. 그중 마곡사는 근대기 화소 가운데 남방화소의 대표적인 곳으로 이곳 출신의 불모를 계룡산화파 라 부르기도 했다.(....)”



법랍을 따질 계제는 아니지만 나도 나이를 제법 먹었다. 세상의 때를 묻힐 만큼 묻혔다는 이야기다. 그간 적잖게 절을 돌아다녔고 부도탑을 유심히 본 적도 많다. 그러나 이런 불모의 부도탑은 처음이었다. 문득 짚이는 바가 있었다. 불목하니와 불모. 둘 사이에 난 희미한 말의 길이 연결되는 것도 같았다.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다. 우리 시대의 성인의 모습은 아아, 용서하시길, 바보의 모습을 띈다는 말이 있다. 영악하고나 똑똑하거나, 하여간 생활에서 닳고닳은 모습에서 성인의 모습을 찾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질 낮은 생각밖에 할 수 없는 나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건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옳을 것 같았다. 조금이나마 배운 먹물들은 그저 묻고 따지기를 좋아하니 제 곁에 온 성인의 길도 의심하기에 바빠서 묻거나 따지느라 인생을 탕진할 것이다.

나의 인상에 깊숙이 자리했던 그 불목하니, 아니 어쩌면 불모일지도 모를 그분의 행적을 내 어찌 알리오. 다만 마곡사의 한 마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기이했던 그분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불국토를 떠났다. 다리를 건너 사천문을 지나고 해탈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오늘밤의 메뉴인 한우 불고기가 기다리는 공주시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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