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구강기
등록일:2017-09-05, 조회수:259
화요일의 심리학 - 정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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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을 읽어보자.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 /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노승석 역, 『난중일기』, 민음사, 2010, 356-357쪽.)

이 구절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1597년 음력 4월 13일과 16일자 일기에서 발췌한 것으로, 어머니를 잃은 아들의 처절한 슬픔을 서술하는 대목이다. 백의종군하는 아들을 만나보려 길을 떠난 어머니가 배 위에서 운명했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그간 어머니를 돌봐드리지 못했을뿐더러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불효자로서의 심정을 토해낸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란 마지막 인용구절은 애도의 과정 중에 흔히 목격되는 주체의 극심한 죄책감의 발현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특히 이 시점의 이순신을 돌이켜볼 때 그 비통함은 더욱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어머니를 여윈 아들은 지금 현재 ‘죄인’의 몸으로, 서둘러 차려놓은 빈소도 제대로 지키기 힘든 처지에 있으니 말이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이고〕”, “비가 크게 쏟아졌다”란 대목이 그 당시의 기상여건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대목인지 어쩐지는 확실치 않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 대목이 감당하기 힘든 충격과 슬픔에 휩싸인 주체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는 대목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주체가 느끼는 극심한 비통함이 두 차례에 걸쳐 “가슴” 부위와 연관되어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1597년 정유년은 이순신에게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한 해였다. 우선 왜군이 7년 전인 임진년에 뒤이어 재차 대규모로 조선정벌에 나선 해로서, 조선이 또 다시 누란의 위기에 처하게 된 해이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해 초 이순신은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백의종군을 해야 했고, 4월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같은 해 10월에는 막내아들 면의 죽음을 맞아야 했다. 전사한 셋째아들 면의 죽음을 서술하는 『난중일기』의 관련 대목을 읽어보자.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조급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펴서 열〔둘째아들〕이 쓴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痛哭) 두 글자가 씌어 있어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남달라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 아직은 참고 연명한다마는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를 지내는 것 같구나. 이날 밤 이경에 비가 내렸다.” (같은 책, 424-425쪽/ 1597년 정유년, 음력 10월 14일)

어미를 잃은 아들의 슬픔과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 중 어떤 슬픔이 더 클까? 아무튼 이순신이 셋째아들 면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이 날도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한 듯〕” 보이고, 밖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공교롭게도 내면 풍경과 바깥 풍경이 정확히 조응하는 경우이거나, 아니면 내면 풍경이 바깥 풍경의 지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을 때처럼,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아들의 죽음이 아비의 탓이며, 아들 대신 아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몹시 자책한다. 한편,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느끼는 극심한 고통이 두 차례에 걸쳐 “가슴” 부위의 통증으로 표현되었던 데 반해,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아비가 느끼는 고통이 이번에는 두 차례에 걸쳐 “간담”을 매개로 표현되고 있다. “간담이 떨어〔진다〕”거나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등의 표현은 주체가 이 순간 실제로 몸으로 겪는 경험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극심한 슬픔과 고통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어머니나 아들처럼 소중한 존재의 죽음에 직면한 주체가 느낄 법한 극심한 고통이 오장육부에 가해지는 통증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은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상 어머니나 아들의 존재는 주체에게 자기 자신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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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멜랑콜리와 애도」란 글에서, 우리가 가까운 존재의 죽음에 맞닥뜨릴 때 무의식적으로 태초에 우리 자신이 형성되던 시기로 되돌아간다고 말한다. 바로 엄마 뱃속에서 나와, 아직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에 우리는 아직 자아를 가지지 못한 까닭에 엄마와 한 몸을 이루며, 엄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공생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예컨대 엄마의 젖을 빨 때, 우리는 우리가 젖을 빠는 젖먹이인지 젖을 물리는 엄마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아직 자아를 갖지 못한 까닭에, 주체와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과 접촉하면서 서서히 우리의 ‘자아’를 구축해나가는데, 다시 말해 우리의 ‘자아’란 접촉했다가는 결국 잃어버리고 마는 바깥의 대상들을 끊임없이 우리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만들어진다.

요컨대, 우리의 ‘자아’란 바로 우리가 경험한 상실의 집합체인 셈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최초로 겪은 상실의 경험으로 되돌아가 잃어버린 대상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자 한다. 죽음으로 우리 곁을 떠난 소중한 존재가 우리 내면에 남겨놓은 공백을 어떤 식으로든 메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정신분석학에서는 애도의 작업이라 부른다. 상실을 메우려는 노력이 무의식적 애도의 작업으로 이루어진다면, 그 양태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구강기’의 성격을 띤다. 구강기란 무엇인가? 구강기란 프로이트가 정립한 ‘정신·성(性)발달 단계의 첫 번째 단계를 말한다.

정신·성발달 단계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신·성발달 단계란 프로이트가 처음 제창한 이래 거듭된 수정·보완을 거쳐 확립된 정신분석학 이론 중 하나이다. 그 핵심은 갓 태어난 아기가 성인으로서의 인격체로 성장하기까지 정신·성적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몇 단계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정신·성발달 단계는 모두 다섯 단계로, 이를 순차적으로 나열하면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 생식기기 등이다. 통상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이 다섯 단계를 차례로 거침으로써 ‘정상인’으로 성장을 하며, 행여 이 다섯 단계 중 어느 특정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 이전 단계에 ‘고착’되거나 ‘퇴행’한다고 일컬어진다.

정신·성발달의 다섯 단계는 리비도(정신·성 에너지)가 주로 우리 신체의 점막 부위를 구심점으로 형성된다고 간주한다. 점막 부위(입, 항문, 질 등)는 그 어떤 신체부위보다도 안과 바깥이 교통하기 용이한 장소로서, 각 단계마다 그곳에 집중하는 리비도는 특징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정신을 구조화한다. 정신·성발달의 첫 번째 단계는 ‘구강기’로, 세상과의 거의 모든 접촉이 입을 통해 행해지는 단계이다. 아직 자아를 갖추지 못한 아이는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지 못하는 채, 좋아하는 것은 입안에 넣고 싫은 것은 뱉어내는 방식이 거의 유일한 세상과의 접촉방식이다. 이를테면, 먹고 먹히는 방식이 주를 이루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인 항문기는 남녀에게 공통된 신체기관인 항문과 또 이곳을 드나드는 변을 중심으로 우리의 정신이 구조화하는 단계이다(‘항문기’ 참조). 세 번째 단계로, 만 5세경에 찾아드는 남근기는 남녀 아동 모두 아직 여성성기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채, 겉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남근에 모든 중요성이 부여되는 단계이다. 더불어, 인간의 욕망구조(오이디프스적 욕망)를 지탱하는 거세 콤플렉스가 형태를 갖추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잠복기는 앞선 단계들에서 형성된 여러 정신적 가치들이 왕성한 사회화를 거치는 동안 무의식의 ‘저편’으로 밀려나는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인 생식기기에 이르면, 이제까지 파편화되어 있던 리비도가 남성의 경우엔 남근에, 여성의 경우에는 여성 성기에 통합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적’ 성인으로서 욕망하는 주체로 행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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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강기는 정신·성발달 단계의 첫 번째 단계인 만큼 이후의 그 어떤 발달단계보다도 조악하고 원시적이다. 유아에게 입이란 기관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물을 섭취하는 통로이자 세상과 접촉하는 창구이기도 하다. 갓 태어난 갓난아이가 무엇이든 입으로 가져가려는 행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기에게 입이란 먹기 위한 통로일 뿐 아니라 세상과 만나고 탐지하는 레이더 역할을 하는 셈이란 점에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구강기는 무엇보다도 입이 부각되는 단계이니만큼 무엇보다 먼저 먹는 행위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아기에게 음식물 섭취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한편, 아기에게 따듯한 엄마의 젖은 생명 연장을 위해 섭취해야 할 영양분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 포만감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앞으로 음식물이 우리의 정신세계 내에서 띠게 될 상징적 가치를 깊이 각인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울적해서 베어 무는 초콜릿 한 조각, 스트레스 해소 차 걸치는 한 잔 술이 음식물 섭취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인정하는 사실이다. 나아가, 이때의 경험은 성인이 되어서도 맛난 음식을 탐하게 하고, 담배며 술, 또는 그 대체물에 탐닉하게 만들기도 한다...

한편, 앞서 강조했듯이, 갓 태어난 아기가 세상과 최초로 접촉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는 바로 입으로, 좋은 것은 입안에 넣고 싫은 것은 뱉어내는 표현양식을 취한다. 좋아하는 것을 입을 통해 우리 안에 넣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행위로 간주된다. 이런 까닭에 합일화 incorporation와 동일화 identification의 기제가 바로 이 단계에서 처음 만들어진다. 이 같은 기제는 카니발리즘 cannibalism이라 불리는 원시풍속이나, 여러 종교의식에서 신을 우리 몸 안에 영접하는 의식 등을 통해서도 똑같이 발휘된다. 한편, 이 단계에서 좋아하는 바깥의 대상은 우리의 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파괴된다. 이를테면 사랑의 행위가 증오의 행위와 한 몸을 이루는 셈으로, 흔히 일컫는 ‘애증이 교차하는’ 양가성(兩價性)의 경험을 일컫는다. 극도의 증오심은 극도의 애정을 전제로 한다는 말은 기막힌 통찰력이 담긴 속설이다. 더불어, 좋아하는 대상이 내 몸 안에 들어오자마자 파괴됨으로써 주체가 느끼는 죄의식 또한 상당하다. 상을 당한 사람이 쉽게 식욕을 잃는다거나, 음식물 섭취를 거부하는 거식증 환자의 경우도 이 같은 구강기의 죄의식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애도기간 중에 주체가 고인에 대해 느끼는 죄의식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고인을 ‘잡아먹었다’는 데서 기인한다...

정신분석학에서 공격성은 주로 항문기와 연관된 채 언급되지만, 구강기 단계에서도 못지않은 공격성이 형성된다. 갓난아이에게 이가 나기 시작하면서, 구강기적 특성에 공격적 성향이 새로이 덧붙여짐으로써 생겨나는 현상이다. 이가 나고부터는 음식물은 비단 삼키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빨로 자작자작 씹을 수도 있는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의 무의식에서는 바깥으로 향한 공격성이 언제라도 뒤바뀌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행여 구강기적 공격성이 주체 자신에게로 향해지는 경우, 그 폐해는 구강기의 원시성에 걸맞게 유달리 가혹할 수 있다. 피해자의 목덜미에 뾰족한 이빨을 박고 피를 빠는 뱀파이어가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인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여차하면 언제든 부활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구강기적 공격성의 이미지임에는 틀림없다. 그 가증스런 입은 가벼운 ‘수다’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성가시게 만들기도 하고, 때론 남을 ‘씹고’, ‘헐뜯고’, ‘물어뜯기’도 하는 험구(險口)가 되기도 하고, 때론 이 달린 여성 성기 vagina dentata 의 이미지로 뭇 남성들의 거세 공포를 자아내기도 한다. 항문기적 공격성이 지배와 피지배, 또는 조임과 이완을 번갈아가며 희생자를 괴롭힌다면, 구강기적 공격성은 희생자를 돌돌 휘감고 나서 위협적인 이빨을 들이대는 독사의 이미지에 가깝다. 흔히 ‘섭식장애’라 불리는 거식증, 포식증(거식증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질환이다) 등이 그 어떤 심리적 질환보다 완치가 쉽지 않은 까닭 또한 바로 이 같은 잔혹하고 원시적인 공격성이 복잡하게 꽈리를 틀고 있는 탓이 크다...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장군이 어머니의 부음을 접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끼고 막내아들의 죽음을 접하며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까닭은 그 가슴과 그 간담이 나의 가슴이자 나의 간담인 동시에, 어머니의 가슴이자 아들의 간담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어머니의 빈자리, 막내아들의 빈자리를 내 몸으로 어떻게 메울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머니는 바로 내가 젖을 물린 어머니이고, 그 아들은 바로 나의 간담을 녹여 만든 아들이 아니던가?


ⓒ 정재곤, 2017.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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