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서울은 위험하다
등록일:2018-06-15, 조회수:226
일생의 일상: 책, 영화, 연극, 생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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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는 뜻밖의 휴일이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있는 날.

휘장을 걷고 들어가 투표를 했다.
용지를 마주하고 기표하기 전이면 사람주나무가 떠오른다.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나라 기표도장에는 무늬가 있다. 그냥 동그라미로 하면 투표지를 반으로 접었을 때 인주가 묻어 무효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넣은 것이다. ‘사람 인(人)’인 줄로 알았는데 ‘점 복(卜)’이라고 한다. 기표소에 들어가 심호흡을 하는데 사람주나무 생각이 났다. 사람주나무의 줄기는 사람의 벗은 몸처럼 매끈하다. 손으로 만지면 분처럼 흰 가루가 묻어난다. 오래될수록 울퉁불퉁한 알통 같은 마디를 빚기도 한다. 가을이면 아주 붉게 단풍 드는 기품 있는 나무. 오늘 지리산에서도 사람주나무를 보게 될까. 사람주는 ‘사람이 주(主)다’는 말의 준말이 아닐까. 붉은 도장을 불끈, 눌렀다.
---------- 경향신문 2014.6.16.자. <꽃산꽃글>에서 인용함


투표를 마치고 나니 오후 6시가 기다려졌다.
몇 해마다 이 시각이 되면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이른바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가 아무리 싱거운 싸움이라지만 뚜껑은 열어보아야 아는 법.
오늘 하루도 제 뚜껑을 닫는 오후 6시 무렵을 기다리는 게 좀 지루했다.

장자 공부를 하는 모임의 도반들과 인왕산에 올랐다.
여름이 승한 시기이다.
오후 4시에 옛 궁리사무실에서 만났는데 아직 한낮의 기운이 펄펄 날았다.

정다운 통인시장을 지나는 동안 추억에 젖었다.
몇몇 분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점점 시장의 기능을 잃고 관광지로 변하는 통인시장.

막걸리 몇 통을 짊어지고 최단코스로 올라갔다.
힘겹게 땀을 좀 뽑아내고 싶었다.

불국사-석굴암-치마바위로 오르는 길.
이렇다 할 꽃은 없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시기라 꽃들도 형편을 살피는 중인가 보다.

석굴암 앞 팥배나무는 꽃을 잃고 열매가 다닥다닥 솟아나고 있다.
언젠가 나에게 커피를 매개해준 고마운 나무.





숨을 몰아쉬며 석굴암 마당에 들어서는데 손톱만 한 흰 꽃들이 모여 접시를 엎어놓은 듯 가지 끝에 둥글고 도톰하게 달려 있었다. 우와, 팥배나무네, 라고 했더니 마침 곁에 있던 주지 스님이 “팥배나무를 아는 거 보이 나무에 해박하시네!”라고 하면서 커피 한 잔을 주었더랬다. 인왕산에서 팥배는 흔한 나무이다. 최근 서울성곽사업을 하면서 둘레길을 정비했는데 팥배나무는 제거 대상으로 지목되어 벌목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인왕산에서 팥배나무를 알아보는 게 과일가게에서 딸기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인지라 그리 우쭐할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후 나는 이 나무에게 돈독한 정을 느낀다. 머리털 난 이후 나무로서는 처음으로 나에게 칭찬과 커피를 매개해준 팥배인 것이다.
----- 경향신문 2015. 6.15일자. 경향신문 2014.6.16.자. <꽃산꽃글>에서 인용함



인왕산 능선에 오르기 직전 넓은 돌에 앉았다.
유치원이라면 한 반이 모여서 수업을 하고도 남을 만큼 넓은 바위였다.
가까이에서 밤꽃이 활짝 피었다.

어스름 저녁에 전해오는 야릇한 밤나무 꽃냄새.
요즈음 이 지역 아랫마을 사람들의 밤생활이 좀 시끄럽겠군.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남산에 남산탑이 보인다.

만약에
만약에

석달에 내릴 눈이 하룻밤에 다 내린다면
서울은 눈에 폭 빠질 테고

명동이든 을지로든 광화문이든 종로든
천지분간을 못할지라도

아마 저 남산탑은 우뚝해서
이곳이 서울임을 표식해줄 것이다.

내처 조금 더 올랐다.
인왕산은 바위산이다.

암벽에 미끄러지지 말라고 주의판을 붙여놓았다.
그게 지금 이 자리, 인왕산에서만의 일일까.

저기 저곳,
수많은 불빛이 명멸하는 곳,
민주주의 꽃인 선거 결과가 곧 발표되는 곳,

수많은 욕망과 욕망이 부딪히는 곳,
각각의 시선과 시선이 뒤엉키는 곳,

정작 위험한 곳은 저곳이라고,
위험한 서울을 지그시 가리키고 있는 팻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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