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난민①_두 예멘의 운명
등록일:2018-09-11, 조회수:123
감옥 밖의 감옥 - 이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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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하비즘, 이슬람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자!

1979년 11월 20일 사우디 왕실은 충격에 휩싸였다. 무전기, 자동 소총, 기관총을 든 400~500명의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단이 5만 명의 이슬람교인이 순례 중이던 메카의 중앙 모스크를 왕정 타도를 내걸며 점령했다. 열흘이 넘도록 저항하던 무장단은 12월 3일에야 겨우 진압되었다. 생존자는 170명에 그쳤고 60여 명이 참수당했다.

무장단의 주축은 신학도들이었다. 그들은 텔레비전, 영화 같은 서구 문화 유입을 방치하면서 이슬람 성직자를 금력으로 타락시키는 사우디 왕실을 성토하면서 이슬람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사우디 왕실 자체가 와하비즘이라는 이슬람 근본주의 종파와 한몸이었기에 사우디 왕실은 당혹했다. 와하비즘은 18세기 중반 무함마드 압둘 이븐 와하브가 만든 우상 타파 이슬람 종파였다.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이 새겨진 코란만을 문자 그대로 신봉하면서 무함마드를 포함한 일체의 성인 숭배를 규탄했다. 사우디 왕조의 직계 선조인 무함마드 빈 사우드는 와하비즘에 근거해 국가를 통치하자는 협약을 1740년 와하브와 맺었다. 사우디 왕조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공유하는 ‘순수’ 이슬람 세력이 사우디 왕조를 부정하니 사우디 왕실은 곤혹스러웠다.

1979년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의한 메카 점령으로 사우디의 안보 노선은 크게 달라졌다. 사우디 정부는 와하비즘 같은 국내의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 불만 세력을 국외로 대거 내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을 사우디 왕정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던 국외의 세속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써먹었다. 아프간 사회주의 정부군 및 소련군과 맞서 싸운 이슬람 반군 무자헤딘 속에는 사우디에서 온 이런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다수 섞여 있었다. 알카에다를 만든 오사마 빈 라덴도 그런 사람이었다. 사우디는 여자의 사회 활동을 일체 불허하고 자기와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른 사람은 같은 이슬람 신자라도 이단으로 몰아 폭력으로 응징하는 극보수 이슬람 근본주의 종파 와하비즘을 설파하는 학교를 엄청난 자금력으로 전세계에 세웠다.


두 예멘의 운명

사우디의 와하비즘은 사우디 남쪽에 붙어 있던 예멘에도 불어닥쳤다. 아라비아 반도에는 예멘과 사우디 말고도 카타르,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오만이 있지만 예멘은 두 가지 점에서 남달랐다. 첫째, 자원이 빈약했다. 유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구에 비하면 유명무실했다. 둘째, 아라비아 반도의 다른 나라는 모두 세습 왕정이었지만 예멘은 공화정이었다.



(cc) 
 Mnmazur 

예멘인은 사막 유목민이 대다수였던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드물게 2천 년 이상 농경민으로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컸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남예멘과 북예멘으로 갈려 살았다. 홍해와 아라비아해를 잇는 길목으로 무역항 아덴이 있었던 남예멘은 1839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가 1869년 개통되면서 남예멘은 더욱 중요해졌다. 남예멘은 무장 항쟁을 통해 1967년에야 겨우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사회주의 체제를 택했다.

북예멘은 한때 오토만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차대전 이후 왕국으로 독립한 뒤 1962년 공화국이 되었다. 당시 사우디는 국경을 맞댄 북예멘에서 공화정이 들어서자 불안을 느끼고 예멘의 왕당파와 보수 이슬람 세력을 주축으로 반란군을 지원했다. 그러자 50-60년대 아랍민족주의의 기수였던 나세르의 이집트도 북예멘 신생 공화국을 지원했다. 북예멘은 이집트를 등에 업고 사우디의 체제 와해 공세를 이겨냈다.

그러나 1967년의 3차 중동전쟁 이른바 ‘6일전쟁’에서 이집트를 주축으로 한 아랍 동맹군이 이스라엘에게 패하면서 북예멘은 주권국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패전으로 재정난에 봉착한 이집트는 예멘에서 손떼면 경제 지원을 해주겠다는 사우디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고 이때부터 북예멘은 사우디의 종속 국가가 되었다. 남예멘이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먼저 독립한 북예멘 공화국은 아랍사회주의를 추구하면서 게릴라 전사들을 남쪽으로 보내 남예멘의 독립 항쟁을 지원했지만 이제는 사회주의 국가로 독립한 남예멘이 사우디의 입김 아래 극렬 이슬람주의자들이 활개 치는 북예멘에다 공화파 세력의 지원군으로 게릴라 전사를 보냈다. 남예멘과 북예멘은 반군 세력을 지원하며 반목했다.

특히 1970년대 초반 이후 유가 폭등으로 아랍 산유국들이 떼돈을 벌면서 자원 빈국 북예멘은 일자리를 찾아 사우디 같은 자원 부국으로 간 자국민이 보내주는 송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처지가 됐다. 사회주의 체제였지만 남예멘도 사정은 비슷했다. 남예멘도 재외 취업 국민의 송금 없이는 체제를 꾸려가기 어려웠다. 노동력이 빠져나가 국내 임금이 치솟으니 국내 산업이 자리잡기 어려웠고 수입 물자에만 의존했다. 북예멘 남예멘에서 모두 국민이 내는 세금이 아니라 재외 국민이 보내오는 송금과 주변 자원 부국들의 원조에 기대는 기형 경제가 자리잡았다.



북예멘에 개입한 이집트군
 

통일 후 찾아온 후폭풍

80년대에 남예멘과 북예멘의 중간 지대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통일 움직임이 싹텄다. 유전 개발을 위한 갈등 감소 필요론과 규모의 경제론은 통일 기운을 띄웠다. 1989년 11월의 베를린 장벽 붕괴는 예멘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남예멘과 북예멘은 독일보다 한발 앞서 1990년 5월 22일에 전격 통일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호경제는 그림의 떡이었다. 경제난은 오히려 가중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그해 여름 일어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었다.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재정 지원을 모두 의식한 예멘이 어정쩡한 중립을 택하자 사우디는 예멘을 성토하면서 예멘 노동자가 사우디에서 누리던 특수 지위를 박탈했다. 그때까지 예멘인은 영주권 없이도 사우디에서 일할 수 있었지만 이제 영주권 없는 예멘인은 돌아가야 했다. 당시 예멘은 성인 남자의 최대 30퍼센트가 재외 거주 노동자였다. 100만 명이 넘는 예멘인이 직격탄을 맞고 귀국길에 올랐다. 예멘 실업률은 4퍼센트에서 40퍼센트로 폭등했다. 외화 고갈로 예멘 통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수입품 중심의 물가는 폭등했다. 송금액 급감으로 국가 재정은 파탄에 직면했다. 통일과 함께 시작된 경제난은 남북 갈등을 키웠다.

경제난과 함께 이념 갈등도 깊어졌다. 이념 갈등에 불을 지른 것은 아프간에서 돌아온 극렬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신을 모르는 빨갱이들’을 응징해야 한다며 남예멘의 유력 지식인, 정치인을 대거 암살했다. 북예멘에서 20년 넘게 독재자로 군림하다가 통일 이후에도 대통령으로 등극한 살레는 극렬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을 은근히 즐겼다. 극렬 우파와 좌파 사이에서 자신을 예멘의 구심점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남예멘은 북예멘 지도자의 얄팍한 계산에 환멸을 느끼고 1994년 다시 분리 독립을 선언했지만 아프간에서 전쟁 경험을 쌓은 극렬주의자들을 등에 업은 예멘 정부군은 남예멘 분리주의자들을 무력으로 짓밟았다. 남예멘은 통일의 주체가 아니라 무지막지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비호하는 북예멘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며 울분을 삭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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