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정토에 발을 묻다
등록일:2019-03-15, 조회수:127
일생의 일상: 책, 영화, 연극, 생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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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다. 따뜻하다. 눈부시다. 종요롭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봄이다. 빳빳한 싸리나무 가지처럼 내리꽂힌 햇살 사이로 걸어간다. 오늘 걷는 길은 운제산 산여계곡. 물감이 빠진 낙엽의 무채색은 잿빛 승복의 색이다. 층층나무 잎은 더욱 그렇다. 이곳은 숲은 아주아주 불교적이다. 세상에서 받은 것은 고스란히 세상한테 다 돌려준 뒤 지하로 녹아드는 낙엽들 사이로 날개현호색이 환하다. 옆구리에 날개를 달고 그 어디로 비상하는 듯한 몸짓이다.



이곳은 어디인가. 경북 경주와 포항이 맞붙은 운제산 일대의 산중이다. 이 일대는 혼자 특출하게 높은 산은 없다. 모두들 다정하게 어깨를 걸고 있는 형제들처럼 고만고만한 산들이다. 따라서 골짜기와 계곡들이 풍성하게 발달했다. 울퉁불퉁한 산들이 있는 만큼 표면적이 넓어졌다. 이들이 지어내는 이야기도 많다. 이 고장에 오면 무언가 신령한 기운에 휩싸이는 건 이런 지리적 환경 때문일 것이다. 경주는 그야말로 꽃대궐이다. 웅숭깊은 불교문명이 발흥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운제. 雲梯. 구름의 사다리라는 뜻이다. 한국불교 사상에 큰 발자취를 남긴 원효대사를 비롯해 고승들이 험준한 산과 계곡을 건너 구름을 사다리 삼아 왕래하였다. 그 뜻을 살려 운제산이라고 한다. 운제산 동쪽 기슭에 있는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세워져 의상, 자장, 원효, 혜공 대사가 수도하던 절이다. 인걸은 가고 없지만 이름은 아직도 남아서 골짜기를 휩싸고 돈다. 바람이 세게 불면 저 야릇한 골짜기에서 툭, 주장자 짚고 튀어나오실 것 같다.

물길을 따라 이웃해서 흐르는 산길은 시멘트 길이다. 낙엽하고 비슷한 색깔이다. 이 길위로 많은 차들이, 많은 사람이, 많은 그림자들이 지나갔다. 길은 맨질맨질하게 닳았다. 좁은 골짜기에서 바람이 불면 피할 데 없는 낙엽들이 한 움큼 몰려나온다. 이곳에서의 낙엽은 그냥 떼굴떼굴 구르는 낙엽이 아니다. 나를 겨냥하여 오는 것 같다. 이놈아, 너는 지금 어디에서 뭘하고 있느냐! 무섭게 옛스님들이 맨발로 쫓아오는 것 같다. 막대기 들고 이놈아, 게 섯거라..........!!

길 옆에 소슬한 집 한 채가 있다.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가게인 줄로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작은 사찰이었다. 나그네의 출출한 배를 달래줄 메뉴판인 줄 알았는데 절의 입간판이었다. ‘동동주/파전/닭백숙’이 아니라 ‘정토사/淨土寺.’

바람이 불었다. 여기는 예토(穢土)다. 예토란 아무런 번뇌도 고통도 없는 극락세계를 이르는 정토(淨土) 대응하는 말이다. 깨달음의 맑고 세계를 보지 못하는 곳이다.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다. 문명의 끄나풀인 등산화로 딛고 있는 바로 이곳이다. 자동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여기다. 낙엽과 나무, 산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 현장, 이 자리는 예토다. 한 소식을 얻으려면 저 고개, 저 산을 넘고넘어야 한다. 마음의 언덕을 숱하고 비비고 건너야 한다.

바람이 더욱 세게 불었다. 예토 속에 있던 나. 맨발로 달려드는 낙엽을 피해 도망친다. 의상, 자장, 원효, 혜공스님을 피해 얼른 안내판 속으로 건너뛰었다.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던 나, 띵띵한 나. 잠깐 머리부터 발까지 몽땅 옮겨간 나. 잠시, 잠깐, 정토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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