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약천사 입구 영산홍 아래에서 만난 반야심경
등록일:2019-03-21, 조회수:171
일생의 일상: 책, 영화, 연극, 생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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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학산 약천사 아래 사하촌은 각종 식당이 즐비하다. 어제 어떤 모임이 있어 옻닭으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배도 꺼줄 겸 걸어서 심학산을 넘어 사무실로 복귀하기로 했다. 중학교 시절 지독한 만원버스가 아니라 집 뒷산을 걸어서 등하교를 했는데, 그때 그 시절 생각이 나기도 하는 가운데 주위는 봄이 오는 기미가 무성했다. 미세먼지도 잔뜩 포진해서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절 아래 소나무 기둥에 매어둔 백구가 늘어지게 자다가 나의 인기척에 일어나더니 사납게 짖었다. 나에게 혹 그간 이웃 친구로 지냈던 암탉의 냄새라도 느꼈던 것일까. 처음 보는 처지도 아닌데 예전보다 훨씬 사납게 짖는 것 같았다. 괜히 내 스스로 마음이 찔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약천사는 그리 큰 절은 아니지만 이 지역의 위패를 모시는 절로 유명하다고 한다. 며칠 전에도 똑같은 코스를 경유한 적이 있었다. 그땐 입구에서부터 관광버스를 비롯해 장비를 잔뜩 실은 차들로 복잡했다. 검은 승용차들도 북적대었다. 알고 보니 SBS의 어느 주말 연속극을 찍는 중이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배우들이 약천사 경내를 거닐고 있었다.

오늘은 검은 상복을 입은 분들이 절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짐작이 갔다. 비로소 멀리 주차장에 있는 장의차도 보였다. 사랑하는 가족을 산으로 모시고 그 위패를 약천사에 모시는 예식을 치르는 중인 듯 했다. 슬픔으로 가득 찬 유족과 그 일가친척들의 얼굴을 보는데, 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모두 연기가 따로 필요 없는 배우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지금 당장 이 슬픔의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나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약천사 지장보전 맞배지붕 처마 밑에 이런 글귀가 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무엇에 묶이고 무엇을 두려워하랴.” 죽은 이는 다만 어제에 머물고 산 이들만 오늘로 옮겨온 것이다. 죽은 이가 오늘로 오지 못 하듯, 산 자들이 어제로 가지 못해서 이별은 생겨났다. 서로를 위로하느라 당사자들의 눈으로 들어가지 않겠지만 내년 1주기 때에는 충분히 한 조각의 위안이 되리라.





그이들은 하행선, 나는 상행선. 밋밋한 몸, 마음속의 눈물을 한 방울 보태며 행렬과 엇갈리는데 약천사 앞 작은 화단에 영산홍이 있다. 아직 꽃망울도 보이지 않는 작은 나무들이다. 그 영산홍 아래 문패 같은 나무조각이 세워져 있다. 자세히 보니 나무에 반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 새카맣게 조각되어 있다. 마침 스님 한 분이 지나가시길래 물어보니, 아 우리도 잘 모릅니다. 누군가 저렇게 마음을 세워놓고 가셨나 보네요, 하신다.

나도 한때 울적한 마음이 들 때, 관제엽서에 반야심경을 빽빽이 적어 몇몇 분들게 보낸 적이 있다. 그때 그 생각도 나면서 야외에서 나무에 나뿌끼는 글자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개공도일체고액 사리자......





사람이 조각한 나무팻말에만 저 절절한 뜻이 있을까. 영산홍에도, 소나무에도 뜻은 조각되어 있다. 이 나무, 저 나무, 이 꽃과 저 꽃들은 모두들 지하에서 올려보낸 신호들이다. 반야심경 만큼이나 심오한 문자들이다. 줄에 묶인 백구 옆에서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산수유. 달래보다 진한 진달래, 생각이 많은 생강나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가자가자....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을 세 번 외며 심학산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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