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왕이 된 남자, 대통령이 된 남자
등록일:2017-05-26, 조회수:203
일생의 일상: 책, 영화, 연극, 생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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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들었다. 아직 산에 정착하지는 못한다. 그러기엔 나의 담력이 부족하다. 산의 바깥에 두고 온 물건도 너무 많다. 내 안에 담긴 욕망은 너무도 끈질겨서 저기 바깥과 탯줄처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부스러지는 소리,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바람을 따라 나무들끼리 부딪히는 소리, 청아하다. 그건 하늘로 통하는 문이라도 열리는 듯 삐거덕거리는 소리. 그런 소리들과 동무하면서 깊숙이 산으로 들어간다.

내가 내는 소리도 있다. 내가 풍기는 냄새도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르르 산골짜기로 깊숙이 떼지어 몰려간다. 그럴 때면 저 멀리 깊은 계곡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만만하고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새소리가 아니다. 한바탕 붙으면 내가 꼼짝없이 당할 짐승이 우우우 내는 소리.

이런 적도 있었다. 마산 의림사의 어느 골짜기. 겨울과 봄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계절이었다. 겨울이 조금 승한 편이라서 눈이 아직 많이 쌓여 있었다. 찬 기운과 으스스한 냉기가 산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얼음이 완강하고 개울물은 꽝꽝 얼었다. 그런 개울을 끼고 한참을 걸어 거슬러 올라갔다.

우리의 거친 숨소리가 전달이 되었나.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졌나. 간헐적으로 짐승의 소리가 들렀다. 무서워 조금 쫄아든 나를 보고 꽃동무가 말했다. 저건 우리의 기척을 듣고 우리를 경계하는 멧돼지의 신호입니다.

그건 우리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도 같았다. 너희를 건드리지 않을 테니, 너희도 우리를 건들이지 말라. 웬만하면 서로 마주치지 말자는 타협의 소리인 것도 같았다. 나에겐 금쪽같은 새끼가 있다. 내 새끼가 다치면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 그러니 제발 가까이 오지 마라, 부탁하는 것도 같았다. 다만 안타까운 건 멧돼지의 신호는 모두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아니다. 음조와 성문이 다 다를 터인데 내 귀가 둔해서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꽃을 향한 우리의 열망은 대단해서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꽃이 있는 곳까지 나아가야 했다. 멧돼지와의 팽팽한 긴장을 의식하면서 내처 나아간 끝에 어느 옴방한 지형에 도착했다. 그루터기가 듬성듬성 눈에 띄었다. 그 사이에 마침내 눈 속에서 의연히 막 피어나는 붉은대극을 만났다. 붉은대극은 며칠 후면 더욱 완연히 꽃봉오리를 눈밭에서 터뜨릴 것 같았다.

우리가 나아간 만큼 짐승의 가족들은 골짜기 안으로 더 쫓겨 들어간 것일까. 인간들의 멈출 줄 모르는 발자국 소리에 포기를 했는지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골짜기 저 너머에서 더욱 싸늘한 냉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몰려나왔다. 아마도 공기의 흐름으로, 우리들끼리의 수런거림을 가까운 어딘가에서 짐승의 척후병들이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라고 그들을 괜히 해코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서둘러 산을 빠져나왔다. 오늘을 마감하는 태양도 세상을 막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꽃을 보고, 짐승의 기미를 느끼며 산을 나올 때. 오늘 목적했던 망외의 꽃을 보고 나올 때, 무언가를 이룩한 듯 마음이 뻐근해진다. 카메라로 포획한 근사한 꽃사진이 든든한 재산(財産)이라도 되는 양 기분이 뿌듯해지기도 한다.

하루를 산다는 건 내가 몸을 움직이고 동원하여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다. 그간 많은 일을 하고 살았지만 산에 들어가 산에서 뒹굴고 온 것보다도 더 보람찬 일은 없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다. 동네 한 바퀴가 아니라 산 한 바퀴를 하는 것, 보람찬 하루 일과의 최고봉이 아닐 수 없겠다.

그렇게 나름의 흥건한 기분과 상쾌한 기운을 느끼며 산을 나올 때, 나 혼자 하는 은밀한 의식이 하나 있다. 많은 것을 품어 간직한 골짜기를 다 빠져나와서 잠깐 뒤돌아서서 산에게, 골짜기에게, 내가 막 통과한 호젓한 산길에게 깊고 짧은 목례를 올린다. 배꼽인사를 하기도 한다. 잠깐이지만 저 산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운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산이 배출한 하루코스의 특별졸업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이는 산과 보이지 않는 산의 기운을 생각하며 고개를 깊숙이 숙일 때 모범이 되는, 꼭 그렇게 나도 따라하고 싶은 모델이 되는 장면이 있다. 그건 영화 광해의 마지막 장면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붕당정치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8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점점 난폭해져 가던 왕 ‘광해’는 도승지 ‘허균’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위협에 노출될 대역을 찾을 것을 지시한다.
이에 허균은 기방의 취객들 사이에 걸쭉한 만담으로 인기를 끌던 하선을 발견한다. 왕과 똑같은 외모는 물론 타고난 재주와 말솜씨로 왕의 흉내도 완벽하게 내는 하선. 영문도 모른 채 궁에 끌려간 하선은 광해군이 자리를 비운 하룻밤 가슴 조이며 왕의 대역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광해군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허균은 광해군이 치료를 받는 동안 하선에게 광해군을 대신하여 왕의 대역을 할 것을 명한다. 저잣거리의 한낱 만담꾼에서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되어버린 천민 하선. 허균의 지시 하에 말투부터 걸음걸이, 국정을 다스리는 법까지,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들켜서도 안 되는 위험천만한 왕노릇을 시작한다. 하지만 예민하고 난폭했던 광해와는 달리 따뜻함과 인간미가 느껴지는 달라진 왕의 모습에 궁정이 조금씩 술렁이고, 점점 왕의 대역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하선의 모습에 허균도 당황하기 시작하는데...
--------(네이버에서 인용함)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다. 모든 일을 끝낸 도승지 허균은 가짜 광해를 홍길동이 율도국으로 떠나듯 배를 타고 멀리 보낸다. 처음 가짜 광해를 하찮게 보고 이놈저놈 하며 함부로 취급하던 그가 마지막에는 가짜에게 진짜가 배울 것을 배우며 진심으로 깊숙이 예를 표한다. 비록 가짜일망정 백성에게 진심으로 해야 할 바를 깨우쳐준 것이기에 허균은 진심으로 한때의 왕에게 진심을 다하여 작별하는 것이다. 술병을 기울여 술을 따르듯 몸을 깊숙이 기울여 몸 안의 예의를 따라주는 장면.



그제는 출판사 대표 몇 분이랑 주중에 모처럼 시간을 내어 산으로 내달렸다. 오래 전에 한 약속이라 나도 조금 무리를 해서 동참을 했다. 조령 3관문 옆의 여섯 개의 험난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부봉(釜峰) 코스였다. 간단한 줄로 알았는데 거의 유격을 방불케 하는 산행이었다.

아침에 출발할 때 오늘이 5.18기념일 줄은 알았지만 그 사실을 오래 유념할 수 는 없었다. 지나가는 풍경, 산으로 든다는 상쾌, 어쨌든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후련함이 그런 것들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헉헉거리며 신갈나무가 무성한 산길을 걷고 걷고 걸으며 정상을 향해 걸어올랐다. 여기는 오로지 걸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더덕냄새를 풍기고 족도리풀이 무성한 어느 고개에서 도시락을 풀었다. 한 선배가 집에서 준비한 일상의 점심은 풍성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는데, 이건 그 이상이었다. 막걸리도 한 순배 돌리고 밥을 먹는데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망월동 기념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었다카네!

산중에서는 산에게만 신경을 쏟았다. 암벽을 줄곧 타야 했기에 다른 여유도 없었다. 해가 아직 많아있는 건 여름 덕분이었다. 후끈한 기운이 그림자 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이제 본격 더위가 시작되는 기운이 사방에 빽빽했다.

오늘도 그렇게 골짜기와 산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경 새재의 편평한 길에 합류하기 직전, 몸을 돌려 깊숙이 몸을 숙이고 인사를 했다. 나를 조금이나마 상승시켰다가 추락케 하는 주흘산, 나를 조그만 깊이에 담갔다가 끄집어빼는 부봉 골짜기. 그들은 멧돼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거친 숨소리에 거친 나의 발길을 감당했건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어떤 경지를 머금은 채 나를 배웅해주었다.



그리고 서울로 오는 길. 문명의 총아인 자동차 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싣고 손바닥 안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 내내 궁금했던 5.18 기념식장의 눈물바다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하던 이도, 그 소식을 나에게 전해준 이도 내심 울컥, 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는데 전해받은 나도 뒤늦게 그 그림을 보면서 울컥, 했다.

흔들리는 차창과 손바닥의 핸드폰을 교대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가 종내에는 페이스북을 기웃기웃거리다가 이런 글을 만났다. 그리고 이 글에 촉발되어 나는 이런 글, <왕이 된 남자, 대통령이 된 남자>을 쓰게 되었다. 영화를 다시 한 번 보아야겠다.

직관적 지식. 벗이자 동지인 노무현 대통령 장례에선 상주 노릇을 하면서도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 3년 후 영화 <광해>의 끝부분에서 너무나 섧게 울더라는 얘기.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안아주고 자신도 눈물을 쏟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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