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경로 의존
등록일:2017-10-18, 조회수:149
화요일의 심리학 - 정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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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휴대폰을 바꿀 때마다 번거로운 일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아예 휴대폰 번호를 바꾸게 되어 지인들에게 일일이 새 전화번호를 고지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전 휴대폰에 저장해놨던 주소록이며 사진, 메모 등을 새 휴대폰에 옮겨놔야 하니 말이다. 어디 그뿐이랴. 지난 해 봄 장기 해외체류를 마감하고 영구 귀국한 나는 바로 새 휴대폰을 장만했건만 몇 주 동안 걸려온 전화조차 제대로 발질 못했다. 전화가 왔을 때 전화기 모양 아이콘을 손가락으로 옆으로 밀어 전화를 받는 요령을 몰랐기 때문이다. 어떤 지인은 나로부터 무수히 많은 영상통화 요청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한 번도 영상통화를 신청한 적이 없었던 탓에 난감하기만 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가장 난감하기는 휴대폰 자판을 사용할 때였다. 내가 새로 장만한 휴대폰에는 ‘천지인’ 자판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는데, 문자 하나를 보내려면 십 분은 족히 걸리곤 했다. 이럴 수가! 사소한 듯 보이지만, 한 번 몸에 익힌 습관을 바꾸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사회심리학의 개념 중에 ‘경로 의존 path dependency’이라 불리는 개념이 있다. 처음 뚫어놓은 특정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몇몇 예를 들어보자. 우선 자판 얘기가 나온 김에 자판에 얽힌 이야기부터 해보고자 한다. 이번엔 영문 자판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 시점에서 볼 때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영문 자판은 ‘쿼티 QWERTY 자판’이라 불리는 자판이다. 1868년, 그러니까 컴퓨터가 아직 발명되기 한참 전인 타자기만을 사용하던 시절 어느 미국인이 최초로 만들어놓은 자판 구성이다. 이 미국인은 당시만 하더라도 ABC순으로 배열된 초기 형태의 타자기를 치다보니 계속 손가락이 엉켜 이 같은 새로운 자판을 고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20세기 중엽, 영문 알파벳의 사용빈도수를 통계적으로 고려하여 새로이 구축된 ‘드보르작 자판’이 탄생했다. 예컨대, 영문 알파벳에서 가장 사용빈도수가 많은 e자가 쿼티 QWERTY 자판에서는 윗열 왼쪽에서 세 번째 자리에 배열되어 있지만, 드보르작 자판에서는 중앙열 왼쪽에서 세 번째에 자리 잡고 있다. 사용빈도가 높은 철자인 만큼 손가락이 가장 닿기 쉬운 위치에 배열함으로써, 노력과 시간을 절약토록 한 인체공학적 자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드보르작 자판은 이처럼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설계되었건만, 이미 오랜 동안 쿼티 자판에 손이 익은 일반대중은 보다 효율적인 드보르작 자판을 새로 익히느니 차라리 비효율적인 예전의 자판을 고집한다... 우리 인간에게 습관이나 관성의 힘이 이성적 판단이나 효율보다 앞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영국 런던을 처음 여행하는 관광객들마다 새롭게 경험하는 일이 있다. 웬만한 횡단보도 초입에는 노란 페인트로 “오른쪽을 보시오! Look right!”라고 쓴 경고문이 바닥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가 영국에서처럼 우측통행하는 경우보다는 좌측통행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배려한 조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횡단보도에 접어들면 본능적으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는 관광객들이 많은 걸 보면, 참으로 습관의 힘이 끈질기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경복궁 외곽에 자리한 고궁박물관에 갔다가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와 순종황후비가 탔다는 ‘어차(御車)’ 두 대를 구경한 일이 있다. 두 대 모두 자동차의 핸들이 요즘처럼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붙어 있었다. 일본의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는 무렵 도입한 자동차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치하의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볼 때면 자동차가 어느 쪽으로 다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일본식을 따랐고, 그래서 자동차가 좌측통행을 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식민 지배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일본이 요즘도 자동차의 우측통행을 준수하고 있는 까닭은 개화기 시절 철도를 처음 영국으로부터 들여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철도의 우측통행이 자동차의 우측통행을 초래했고, 그 같은 ‘관행’이 당시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까지 도입된 것이다...

심리학에서 ‘경로 의존’을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놀라운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이하, 황새오린 외 저, 『세상은 2대 8로 돌아가고 돈은 긴 꼬리를 만든다』 , 더숲, 2012, 참조). 현대 철로의 궤도 간 표준거리는 143.5 cm라고 한다. 마차 바퀴 사이의 너비도 143.5 cm이고, 전차(電車) 바퀴 사이의 표준거리도 143.5 cm이다. 이 수치는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놀랍게도 이 수치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고대 로마의 전차(戰車)를 끄는 말 두 필의 엉덩이 너비였다고 한다. 그 후 이 같은 선례는 마차와 전차를 비롯하여 모든 탈것에 적용되었고, 이에 따라 도로 너비며 터널의 폭 등이 결정되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미국 항공기 연료탱크 양쪽에 달린 로켓 추진체의 너비도 143.5 cm라고 한다. 바로 터널을 통과하기 위한 너비로 설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이나 러시아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이 표준 궤도를 준수하는 대신 광궤며 협궤 열차를 따로 제작, 설치한 까닭은 표준 궤도를 통해 침입해올 외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째서 남성 의복의 단추와 여성 의복의 단추를 끼는 방향이 서로 다른지도 바로 이 경로의존이 설명해준다. 13세기에 서양에서 단추가 발명되던 당시, 남성은 오른손에 무기를 들어야 했던 만큼 왼손으로 단추 끼기가 쉬워야 했고, 또 여성은 주로 오른손잡이 하인이 입혀주기 쉽게 단추가 반대 방향으로 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이야 제 아무리 부유한 여성이라 하더라도 하인이 자신의 옷을 대신 입혀주는 경우는 좀체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별에 따라 단추 끼는 방향이 반대인 채로 남아있는 까닭은 경로의존성 때문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힘들다.

경로의존의 ‘경직성’에 대해 기업들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는 분야도 달리 없을 것이다. 자사가 만들어낸 제품을 누구보다 먼저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선점효과를 거두려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산업계에서 말하는 ‘표준화’ 전쟁이다. 일단 자사의 신제품이 시장에 깔리면 그 이후에 도입될 제품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첫 제품의 규격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1982년 일본의 소니사는 세계 최초로 cd란 새로운 매체를 선보였다. 한편, 1970년대 말 공동으로 cd를 개발 중이던 필립스사와 소니사는 cd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녹음 재생 시간을 결정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지휘자 카라얀을 찾아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카라얀은 cd 한 장에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즉 합창 교향곡 정도는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이리하여 세상에 없던 새로운 매체인 cd는 74분간의 재생시간을 갖는 크기로 만들어짐으로써 음반 시장의 판도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합창 교향곡을 들으려면 앞뒤로 판을 뒤집어가며 들어야 했던 lp 레코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이후의 음반 제작이며 편집 방식도 새로운 ‘표준’에 맞출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이래 세계는 여전히 충격과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트럼프의 강한 개성 탓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특별한 경로 의존의 면모를 나타낸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평생을 사업가로 살았던 트럼프에게 더 이상 사업가가 아니라 정치인으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과연 그러한 전환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배짱과 허장성세, 자기 현시욕, 협박과 위협, 예측 불허, 때론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대할 때면 기성 정치인이라기보다 차라리 노회한 사업가로 봐야 하지 않을까? 북핵 위기가 불거진 이래 우리에겐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 대통령의 의사결정이 더욱 중요해진 만큼, 사업가 트럼프의 복심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경로 의존’의 위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 정재곤, 2017.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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