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동의보감에 대한 생각 1.
등록일:2018-03-22, 조회수:424
일생의 일상: 책, 영화, 연극, 생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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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연속적으로 살아오는 동안 몸에 대한 생각을 가끔씩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외부가 너무 강력하고 재미있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 몸으로 가는 생각은 언제나 절벽으로 가는 길처럼 이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광고가 그렇고, 연속극이 그렇고, 책이 그런 역할을 담당하였다. 밤하늘과 출렁거리는 바닷물도 내 시선을 일부 가져가기도 했다. 최근에는 자연이, 그 안으로 솟아오른 산들이, 그 속에서 불쑥 뛰어나오는 꽃들이 그만 내 시선을 홀랑 빼앗아가버렸다. 아, 서운하신가. 언젠가 당신들이 나의 면전에서 시선을 탐하며 서성거리기도 했었지.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했던가. 그 말에 기댄다면 떠나간 것들은 언젠가 돌아오고야 만다. 빛의 속도롤 달아나지 못하는 한 내 몸의 곁을 문지르고 간 것들은 언젠가 나에게 따라잡히기 마련이다. 어느 날 그것들은 나의 무덤 앞으로 시간 순으로 가지런하게 집결하여 발바닥 앞장세우고 입장하는 나를 기다리겠지.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고 괜히 말머리가 길어졌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동의보감>은 여러 번 접했다. 우선은 “동의보감”이라는 그 네 글자를 만났다. 대단한 의학서라는 상식은 국사 시간에 주입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해 전, 베스트셀러가 되어 엄청나게 팔린 소설책, <소설, 동의보감>을 읽었다. 그땐 출판계에 입문하기 전이라서 그 책이 날개 돋힌 듯 팔린다는 것을 그리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3권으로 된 그 소설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대하드라마를 챙겨 보았다. 동의보감과 나와의 관계는 여기까지 인 듯했다. 다행히 몸도 그리 크게 아프지 않았고 한약방을 찾을 만큼 몸이 곯은 상태는 아니었다. 약방을 찾느니 산으로 가겠다는 생각에 충실했다. 보약은 寶藥이 아니라 補藥일 뿐이라는 생각을 굳건히 가졌다.

실제로 마흔 들어 지리산을 출입하면서 산에 가는 재미에 뒤늦게 눈을 떴다. 더 나아가 사무실 근처 인왕산을 줄기차게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나무와 꽃으로 나의 활동공간이 확, 확장되었다. 그때 무렵 입춘이 入春이 아니라 立春인 것을 알게 되었다. 희미하게나마 이 세계의 중앙이 인간이 아니란 것을, 세상의 중심이 ‘나’가 아니란 것을 받아들이는 작은 깨달음도 있었던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궁리가 파주로 이사하기로 결정하고 이제껏 근 십여 년간 몸을 의탁해온 인왕산과 작별을 고해야 할 날이 왔다. 그냥 헤어지기 싫어서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나름의 작별 의식을 치루는 중이었다. 금천시장, 옥인시장 들을 중심으로 단골가게에도 골고루 들러 인사도 나누었다.

마침내 인왕산에 들러 내려오다가 수성계곡과는 한 골짜기 건너에 위치하는 독립문 근처 영천시장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재래시장으로 입구에서부터 먹을거리가 잔뜩 쌓여 있는 곳이다. 이 시장도 몇 번 와보았던 곳이라 시장의 구조는 대충 꿰는 편이었다. 그곳에 해산물을 나름 잘하는 독립문시장이라는 횟집에 갔다가 문득 헌책방 생각이 났다.

영천시장 끄트머리에 시장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헌책방이 있다. 좁은 골목길의 바로 앞에는 홍어회와 멸치국수를 잘 끓여내는 목포식당이 있었다. 삭힌 홍어향과 종이의 곰팡내가 일합을 겨루는 그곳은 말하자면 내 좋아하는 것들이 한꺼번에 집합된 곳이었다.

몸과 정신을 살찌우는 영양분들이 넘치도록 고여 있는 식당과 헌책방 골목에서 쇼핑을 하는 동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앞으로 얼마를 살지는 모르겠지만 홍어는 제법 여러 번 섭취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목포에도 가볼 기회는 물론 홍어를 좋아하는 이들이 내 주위에는 많고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우짜든동 동의보감은 한번 읽어보고 세상을 뜨야 하지 않을까. 그야말로 아무 까닭도 이유도 없이 그냥 일어난 생각이었다.

예전에 주말을 보내다 심심해지면 동묘 풍물시장을 종종 찾았더랬다. 최근 꽃산행에 빠지면서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그리운 곳이다. 찬바람이 힝힝거리는 작년 말, 구질구질 비가 내려 갑자기 산행이 취소되었다. 이 뜻밖의 주말 시간을 도회지에서 보내자니 문득 낯설어졌다.

꽃 옆이 아니라 텔레비전 앞에 있는 것이 화가 나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어찌 할 바를 몰라 그저 방에서 뒹굴거렸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동묘 생각이 났다. 봄날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넘실대는 사람들의 물결이 눈에 아른거렸다. 혹 만날지도 모를 어느 골동품이 유혹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간 동묘 풍물시장은 예전하고는 확 다른 분위기였다. 이곳을 가끔 출입하는 동안 내가 눈독을 들인 물목은 조금씩 달랐다. 처음 불두(佛頭)를 모으다가 이내 필기구에 집착하다가 나중에는 진공관 음향기기로 옮겨갔다. 물론 내가 구입하는 건 2~3만 원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저 눈에 띄는 신기한 물건이 있으면 챙기고 없으면 그만이다. 가야금, 연적을 구입한 게 기억에 남고 짚신 엮을 때 발뒤꿈취의 역할을 한 나무 목합은 1천 원 주고 산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는 곳은 꼭 헌책방이다. 몇 군데는 커피 한 잔 얻어 마실 정도의 안면은 익혀두었다.

그러다가 들른 어느 헌책방. 그곳은 헌책을 제대로 분류해놓지도 않고 그저 손님들이 알아서 책을 챙겨가도록 그냥 수북하게 쌓아놓은 책방이었다. 도감이나 사전 등속을 살피다가 문득 <동의보감> 생각이 났다. 주인에게 물었더니 안쪽 구석으로 나를 안내했다. 몇 개 판본을 소개하더니 알아서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동의보감>은 이름에 걸맞게 많은 종류의 책이 있었다. ‘동의보감학’으로 하나의 학문으로 분류해도 좋을 판이었다. 하지만 거개가 요약이거나 이를 응용하여 조금 다르게 해설한 책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찾는 건 전문을 수록한 원본이 필요했다. 드디어 찾았다. 케이스까지 제대로 갖춘, 아주 큼지막한, <동의보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집에 와서 책을 읽어보는데 다른 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흥분이 조금 일었다. 책을 지은 허준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책을 만든 식자공에 대한 감사도 들었다. 이런 분들의 출판에 비한다면 요즘 우리가 하는 출판은 어디 명함도 못 내밀 것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사람은 우주에서 가장 영귀한 존재이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의 형상을 닮은 것이고 발이 네모난 것은 땅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하늘에 사시가 있듯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하늘에 육극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육부가 있고 하늘의 팔풍은 사람의 여덟 관절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하늘에 구성이 있듯 사람에게는 아홉 구멍이 있고.....” ---孫眞人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라고 하는 한 장의 그림과 함께 시작하여 당나라의 의사이자 도교사상가인 손진인의 글로 시작하는 <동의보감>은 의학서 이전에 우주와 몸을 꿰뚫는 철학서였다. 동의보감을 읽는다고 내가 나의 오장육부를 다 아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보면 내 몸의 오장육부를 다 만지지는 못해도 그 작동원리를 그저 눈으로라도 한번 훑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宣祖大王光海君御醫許浚 著. 東醫寶鑑. 이 두툼한 책을 읽든 안 읽든, 그 일은 앞날에 맡겨두기로 하더라도 나와 동의보감과의 관계는 이렇게 밀접해졌다. 이제 나는 의자를 뒤로 돌리기만 하면 내 뒤통수 쯤의 높에 늘 대기하는 <동의보감>을 꺼내 내 몸속 탐험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광고 하나를 보는데 눈이 확 뜨였다. 그곳에는 동의보감... (하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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