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뒷모습에 관한 명상
등록일:2018-05-10, 조회수:366
일생의 일상: 책, 영화, 연극, 생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 - 이굴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미투데이로 공유하기
사람의 나이 오십이면 본인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몸을 가장 대표하는 그것을 아침마다 바르고 문지르고 닦지만, 그것만으로 얼굴은 구성되고 관리되는 게 아니다. 세월이 와서 주무르는 데에는 다들 피할 방법이 어디 있겠나. 그러니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저 말은 살아간다는 것의 단정함과 엄숙함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한편, 그 말보다도 더 무서운 게 있다. 사람의 진면목은 뒷모습에 숨어 있다는 말이다. 뒷모습. 자기의 뒷모습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광명한 세상에서 하나의 맹점이 있다면 그건 본인의 모습일 것이다. 자기의 눈으로 유일하게 보지 못하는 곳이 바로 본인이다,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숙명적으로 자기를 보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종내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운명인가 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뒷모습.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뒷모습. 그러나 참 보기 힘든 뒷모습. 바로 며칠 전 여러 뒷모습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아주 강력한 뒷모습이 계기가 되었다. 그 몇 장면을 떠올리며 순서대로 이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장면1. 그림자와 방랑자

몇 해 전, 미술평론을 하는 선배와 거의 일 년을 매일 만나다시피 하면서 질탕하게 논 적이 있었다. 수백 편의 한시를 머리에 담고 있으면서 술 한 잔이 들어가면 그 도저한 흥을 이기지 못해 술집에 마련된 칠판 앞으로 나아가 일필휘지로 갈긴 뒤 마음에 젖어드는 한시를 설명해주곤 하셨다. 선배와 쌓은 많은 추억 중에서 다음과 같은 한 대목도 있었다. 

(.....)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통화를 끝낸 선배는 무언가 생각난 듯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더니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지난 주말 가을을 밟으러 남한산성에 혼자 갔다가 찍은 사진인데 그런대로 괜찮은 거 같애.” 선배가 건네주는 휴대폰 사진을 보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이리저리 홀딱 빠져보는 있는 나를 향해 선배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난 일요일 오후. 페트라르카의 연애시를 읽다가 흥이 도져서 남한산성에 단풍 찍으려 갔지. 단풍을 찍으려다 떨어진 낙엽을 찍었지. 떨어진 낙엽에 나도 떨어지길래 그걸 찍은 걸세. 바람없이도 스러진 나의 모습을.” (.....) 선배한테 핸드폰을 넘기면서 내가 떠올린 그림이 있다. 그것은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였다. 장대한 자연에 심오한 감정을 담아내는 풍경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던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가 그린 그림이다.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는 안개가 자욱한 바다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결정적 차이는 있다. 그림자는 앞모습이고, 방랑자는 뒷모습이다.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모습의 두 남자. 방랑자는 모자를 벗었고 그림자는 모자를 썼다. 지팡이 짚고 기우뚱한 포즈. 기울어진 몸의 각도도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두 사람, 너무나 같은 모습이 아닌가. 방랑자의 앞에 있는 바다가 거친 곳이듯 그림자가 바라보는 바닥도 못지 않게 사나운 곳이다.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사방으로 흩어지듯 바람 불면 낙엽도 먼지를 일으키며 어디론가 떼굴떼굴 정처없이 굴러가야 한다.

 





#장면2. 뒷모습.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한 번씩 그래도 해마다 한두 번은 꼭 떠오르는 책이 있다. 뒷모습을 찍은 흑백의 사진 한 장에 짧은 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으로 유명한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이다. 사진도 좋지만 밀도 높은 글이 읽는 이를 사로잡는다. 사십에 그 책을 읽었더랬는데, 나도 오십쯤이면 저 경지에 오르기를 소망했건만 육십을 목전에 두고도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다만 가을에 시골로 벌초하러 갔을 때, 무덤 앞의 풀을 베고 난 뒤에 형님들께 부탁해서, 모두들 뒤로 돌아선 모습을 찍기는 한다. 한 인생의 총체적 뒷모습인 무덤을 바라보는 형님들의 뒷모습. 거기에는 홀가분하면서도 어쩐지 숨길 수 없는 쓸쓸한 표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장면3. 영화 아버지의 초상

주말 ebs의 세계의 명화는 놓치지 않는 편이다.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후 이틀, 토요일의 영화는 <아버지의 초상>이었다. 그 프로그램의 홈페이지에서 소개하는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티에리(뱅상 랭동)은 실직 이후 2년 가까이 재취업을 위한 직업 훈련을 받고 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다. 그러던 와중에 전 직장 동료들은 티에리에게 자신들을 해고한 고용주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할 것이라며 함께 노동조합에서 싸우자고 권한다. 하지만 티에리는 장애가 있는 아들의 진학과 생활상의 어려움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실직 이후의 곤궁해진 살림살이와 피곤해진 육신 앞에서 티에리는 동료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대형 마트에서 CCTV 등을 통해 고객과 직원들을 감시하는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티에리는 이 일에서 어떤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는 것 같다. 물건을 훔친 이들을 적발한다는 이 일의 명분만큼은 확실하지만 물건을 훔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사연을 듣는 일은 괴롭다. 심지어 동료들의 잘못을 적발해야할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줄거리
 
영화는 과장됨 없이 차분하게 티에리의 일상과 재취업의 과정을 따른다. 전반적으로 배우들(대부분 비전문 배우)의 연기는 절제돼 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반영돼 있는 듯하다. 장면들은 많은 경우 롱 테이크로 촬영돼 있고 관객들은 그것을 지켜보며 마치 티에리의 일상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카메라의 위치, 촬영 방식은 그 자체로 별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별다른 일 없이 견디고, 감내하고,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을 더 없이 잘 포착하고 있다. ---주제
 

영화는 짠하다. 먹먹하다. 머리를 굴린 엄청난 시나리오도 아닌 것 같다.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 누구라도 들이닥칠 법한 소재를 화면으로 옮긴 것 같다. 군대 제대하고도 다시 입영통지서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가 꿈인 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있듯, 그 영화는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듯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어렵게 잡은 직장인데, 벌어지는 일들은 감당하기가 힘들다. 적당히 타협해야 했는데,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사람이기에,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몇 번의 일을 겪다가 티에리는 돌연 회사가 준 유니폼을 벗고 사물함으로 가서 자신의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회사를 떠난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행선지는 있는 것일까. 아무튼 성큼성큼 그저 앞으로 간다. 그를 따라가는 카메라에 잡히는 건 티에리의 넓직한 뒷모습!





#4. 남북의 두 정상.

실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이 이야기로 인해서 내가 겪은 여러 뒷모습이 새삼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2018년 4월 27일 금요일. 아침부터 모든 방송사마다 묘한 흥분이 느껴졌다. 판문점의 재발견이라고나 할까. 남북의 두 정상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역사적 장면을 중계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많은 카메라에 담겼다. 그 자리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실은 잘 모른다. 멀찍이 떨어져서야 객관적 거리도 확보되고 그 전모가 눈으로 겨우 들어오는 것이다. 한차례 흥분이 지나고 그 시간을 돌이켜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생기고, 그 사건은 그 장면으로 대표되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오후의 도보다리(FOOT BRIDGE) 산책을 거론한다. 내게도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제법 오래 롱 테이크로 중계되는 화면을 보면서 함께 등장하는 식물들을 일별해 보았다. 활짝 핀 조팝나무, 바짝 마른 갈대, 버드나무로 짐작되는 식물을 동정(同定)할 수 있었다. 새소리도 들렸다. 전문가들이 식별한 새는 다음과 같았다. 박새, 꿩, 흰배지빠귀, 청딱따구리, 직박구리, 산솔새.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을 진솔하게 설득하는 우리 대통령의 든든한 뒷모습.

하지만 신문에 가장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건 두 정상이 경계선에서 만나 악수한 뒤 잠깐 북측으로 다시 월경(越境)하는 사진이었다. AP통신은 이 사진을 ‘금주의 사진’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적대적이었던 두 정상이 손을 잡은 채 금단의 선을 넘는 뒷모습!





에필로그.

청와대에서 출발한 대통령 일행이 판문점까지 가는 모습을 헬기를 동원하여 중계방송하여 주었다. 공중에서 촬영된 화면을 보는데 북으로 끝없이 뻗어가는 산하의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크든 작든 사람들의 일이란 식물들의 손바닥 안에서 벌어지는 것임을 실감했다. 어느 화면이든 절반을 차지하는 건 연두부터 녹색까지, 나뭇잎들의 완연한 출렁거림이었다. 도보다리 산책도 결국은 두 정상이 나무들 사이를 거니는 것이 아니었던가.

역사적으로 흥분된 일이 지나고 궁리직원들과 임진각 근처로 가서 평양랭면도 먹었다. 지난주에는 평창의 다수리 마을의 산들을 탐방했다. 두 정상이 만나는 물꼬를 터준 평창 동계올림픽의 열기는 어느덧 사라지고 조용한 봄맞이에 여념이 없는 마을이었다. 낮은 야산에서 만난 개구리 한 마리. 바위에 엎드려 세상의 궁금한 기미를 살피고 있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