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이름과 얼굴 그리고 시에 대한 궁리
등록일:2018-08-28, 조회수:208
일생의 일상: 책, 영화, 연극, 생활에서 건져올린 이야기들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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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기획했던 백두산 탐사를 가는 길이다. 새벽에 일어나 몇 개의 문을 통과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행기의 좁은 창문으로 바깥을 살피니 연길공항이었다. 띵,띵,띵 사인이 들어오고 내릴 준비를 하는 승객들로 좁은 비행기 안 통로가 갑자기 빽빽해졌다. 짐칸을 열고 내 몫의 수하물을 챙겨 줄이 슬슬 줄어들기를 기다리는데 누가 내 엉덩이를 툭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느낌이 아니고 실제로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차고 있는 중이었다.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밀집해서 서 있기에 무심코 그럴 법도 하기에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상을 미리 쓰면서 불쾌하게 뒤를 돌아보는데 내 엉덩이를 가지고 노는 이가 그곳에 실제로 있었다. 녀석은 아빠의 품에 안긴 작은 꼬마였다. 아이는 얼굴을 어깨에 묻은 채 발을 덜렁덜렁 거리며 나를 툭툭 건드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아이들의 방학을 맞아 모처럼 여행을 떠난 듯한 일가족. 내 고향의 먼 친척 아저씨 같은 그을린 얼굴의 아빠와 조금 젊은 엄마, 그리고 초등학생의 딸과 나를 건드리는 그 녀석. 엄마가 분주히 짐을 챙기고 말을 하는데 조금 낯설은 억양의 조선족 말투, 심드렁히 대꾸하는 아빠는 경북 내륙의 깊숙한 사투리. 어떤 사정의 여행객이지 짐작이 갔다. 조금 철이 든 아이의 누나는 동생이 나에게 한 장난을 아는지 슬쩍 내 눈치도 보면서 아이에게 눈짓을 하더니 툭툭 자제시켰다. 빙그레 웃으며 꼬마와 눈을 한번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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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발총을 쏘는 듯 중국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입국심사대에 길게 줄을 섰다. 중국공민의 줄은 쉽게 움푹 꺼지는데 외국인들이 통과하는 줄은 좀체 줄어들지 않았다. 단체비자라 순서를 지키며 줄을 맞추고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몹시 더운 날씨지만 외국의 손님을 응대하는 공무원은 자신의 신분과 위엄을 지키느라 정장차림이었다. 중화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위엄이 이들의 복장과 얼굴로 대표되는 셈이었다.

국제공항이라고 하지만 비교적 아담한 연길공항. 작은 입국장 안에 이러저런 안내판에 눈길이 갔다.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런 입간판도 있었다. 근무하는 직원들의 현황판이었다. 그곳에는 명함판 사진이 직급별 순서로 붙어 있고 이름이 차례로 붙어 있었다. 공정과 친절, 엄정한 서비스를 다짐하는 사회주의 관청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현황판을 보는데 특이한 이름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수첩을 꺼내 급히 필기했다. 중국이라 하지만 우리나라의 여느 관청의 업무 조직도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는 성씨가 그곳에 적혀 있었다.

趙00, 徐00, 呂00, 宋00, 金00, 李0, 張00,
金00, 陳00, 雷00, 孟00, 楊00, 王00, 葛文00

우리나라의 출석부라고 해도 별 이상할 것 없는 근무인원 현황표에서 내 눈을 끌어당긴 건 어느 여성의 이름이었다. 더구나 그이는 나와 같은 성씨의 이름이 아닌가.

언젠가 민음사에 근무할 때, 일본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출간하고 저자를 초청했던 행사였다. 가방끈이 짧아 그의 문학 세계를 다 이해하지 못했던 터에 나는 그의 이름에 묘한 매력을 느꼈더랬다.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병곡행인. 무슨 골짜기를 지나가는 행인의 이미지가 이름에서 어른거리지 않겠는가.

이름 가지고 함부로 할 일은 아니지만 무수한 여행객이 오고가는 연길공항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름도 그 이상의 어감을 주는 것이었다. 저런 이름을 가진다는 건 본인에게도 일생을 통해 부담이건, 자부심이건 충분히 영향을 미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엄격한 관공서이다. 내가 알기론 함부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이다. 이것도 위반이라면 잠깐 위반하기로 했다. 한편의 글을 쓸 수 있는 좋은 소재를 그대로 놓칠 수가 없었다. 슬쩍 사진을 찍었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들 보따리 하나씩을 든 승객들이다. 조금씩 줄어드는 줄 옆에 발로 툭툭 밀기도 하면서 데리고 가는 보따리. 그 보따리를 보자면 그 보따리의 주인인 사람들도 또 하나의 보따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치과에 가면 모두 환자, 공동묘지에 가면 무덤 바깥의 행인인 것처럼 이곳에서는 모두들 나란히 가는 보따리들. 얼굴이 몸을 대표하는 보따리라면 이름은 모든 존재를 담는 보따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좀체 줄어들지 않는 외국인 승객의 줄에서 무료히 기다라는 동안, 옆줄은 작은 변화가 있었다. 한번씩 무더기 손님이 들이닥쳤다. 그러다가 옆을 보니 비행기에서 보았던 그 일가족이 우리 옆에 서는 게 아닌가. 여전히 아이는 칭얼대기도 하면서 아빠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이의 누이가 눈을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아는 체를 하였다.

그 가족들은 아이들도 있는지라 보따리가 더욱 올망졸망하였다. 내 짐작을 가지고 말을 붙여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가족들이 모두 여행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엄마가 줄을 정리하는 직원에게 중국어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공무원이 일가족, 특히 어깨에 앉힌 아이들 보더니 줄을 끊고 저 안쪽의 한가한 코너로 가라고 신호를 했다.

후다닥, 소란을 뚫고 나아가는 일가족을 보는데 알겠더라. 그들은 경북 어느 내륙으로 시집온 연길지방 출신의 엄마가 모처럼 친정 가는 길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외가 가는 길!

이 세상 가장 좋은 길은 외갓집 가는 길. 나에게도 어머니와 함께 가는 그런 시절이 있었지. 잠깐 그런 옛 생각에 젖도록 해준 일가족이 떠나고 우리 줄도 줄어들었다. 중국은 최근 입국심사가 엄격하다. 무슨 거창한 이유를 대면서 인체생물학적 정보를 채취한다. 안경을 벗고, 귀걸이는 없애고, 뒷배경을 흰색으로 한 비자의 증명사진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예로부터 국경을 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이력을 통째로 심사받는 건 아닐지라도 혹 무슨 사유로 덜컥, 걸리기라도 할지 긴장이 된다. 지난날이 주르륵 떠오르기도 한다. 모자를 벗고 심사대에 서자 기이한 등록기가 있다. 엄지로는 부족해서 열손가락 전부의 지문을 찍었다.

이제 여권 사진과 대조하는 차례인가. 유리칸 너머 여성이 얼굴을 정면으로 보라고 했다. 무슨 불온한 낌새라도 눈치챈 것인가. 웬일인지 안경도 한번 벗어보라고 했다. 그렇게 중국을 대표한 공관원과 나를 대표하는 나의 얼굴이 부딪히는 동안, 나로서 뚫어질 만큼의 시선으로 상대가 모르게 은밀하게 수행한 일이 있다.

진즉부터 그 여성의 가슴 근처의 이름표를 주시했던 것이었으니, 좀 전 현황판에서 본 탄복할 만한 이름이 바로 그 앞에 붙어 있지 않겠는가. 잠시나마 까다롭게 굴어 미안하다는 듯 조금은 웃은 얼굴로 여권을 돌려주는 그 여성의 이름은 이시(李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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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간 백두산 꽃산행을 무사히 소화하고 돌아오는 길. 비슷한 경로를 되짚어 연길공항에 도착해서 출국심사를 받을 때 혹 이시(李詩) 씨가 나를 처리해줄까 기대했지만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웬 우락부락한 중국인다운 세관원의 퉁명스런 심사를 묵묵히 견뎌야 했다.

좌석에 앉아 조국의 신문, <경향신문>을 펼쳤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아, 한글 냄새!

하필이면 이런 귀국길에 이런 기사를 만나나. 1면과 12-13면을 털어 비전향 장기수 19명의 사연을 전하는 기사였다. 내가 뭐라고 한마디라도 덧붙일 건 없다. 다만 며칠 비웠다고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그곳이 저이들에겐 또 다른 감옥이라는 사실임은 분명하다 하겠다.

1면의 제목이다. “빨갱이, 나를 송환하라” 그리고 한 늙은이의 사진 아래 이런 사연. “서옥렬(90)씨는 비전향장기수이다. 1961년 남파공작원으로 내려왔다가 30년을 옥살이했다. 전향을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에도 정치적 신념을 지켜냈다. 늙고 병든 몸은 이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의 소원은 북에 두고 온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는 것이다.”





12-13면에는 여권용 사진보다 더 큼지막한 19명의 얼굴과 명단이 있다.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이두화, 서옥렬, 허찬형, 양원진, 최일헌, 박정덕, 박수분,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강담, 박희성, 양희철, 김동수, 이광근.”





복역기간을 합치면 384년이라는 저 이름들. 나도 한때 시인이라는 타이틀에 목을 멘 적이 잠깐 있었다. 실제로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천한 시심은 금방 들통이 나서 그 세계로부터 힘껏 도망치고 말았다. 나의 이력을 아는 이가 가끔 옛시집을 이야기하고, 시의 근황을 묻기라도 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아주 머나먼 곳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 인간의 일생은 누구나 시인. 그가 살아낸 여러 줄의 이력이 곧 시다. 그의 이름은 곧 그 시의 제목이겠다. 시인이 되는 것이 어려운 일에 속할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고인이 되는 것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언젠가는 가지겠지만 당장 함부로 가질 수 있는 호칭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시인(詩人)보다는 고인(故人)!

실제로 고인이 되기 일보 직전의 비전향장기수들의 절절한 사연을 읽다가 다시 상단의 제목, “남과 북 사이에 갇힌 그들, 돌린다고 돌아설 수 없던 마음 여전히 붉다”라는 문장으로 올라가는데 사람의 이름과 인간의 얼굴에 대한, 그리고 시에 대한 많은 궁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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