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
등록일:2019-01-15, 조회수:205
화요일의 심리학 - 정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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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까지 이 영화를 관람한 누적관객수가 9백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이미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이처럼 예기치 못했던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만큼이나 다른 흥행영화에서와는 다른 특이점들이 눈에 띈다. 어째서 관객들은 이 영화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그것도 젊은 관객들 못지않게 나이 지긋한 중년의 관객들이 관람석을 가득 메우고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론 정신줄을 놓고 춤을 춰가며 떼창을 부르기도 한다니, 이 영화엔 분명 특별한 뭔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 영화가 개봉된 이래 중년남성들의 악기 구입이 폭증하고 있다는 소식 또한 이 영화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보다 우리나라의 영화 관람객 수가 더 많다고 하니, 여기엔 뭔가 한국적인 상황에 호소하는 뭔가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게 뭘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1960~1980년대 전 세계 대중음악계를 주름잡았던 영국의 보컬그룹 ‘퀸’, 특히 이 그룹의 리드싱어였던 프레디 머큐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기영화이면서, 이들이 불렀던 곡들의 선율이 영화 전편에 걸쳐 풍성하게 흐르는 음악영화이다. 그룹의 전성기에 발표됐던 ‘보헤미안 랩소디’나 ‘라디오 가가’, ‘우리는 챔피언’ 등의 노래가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면 그 당시 이 음악을 들으며 청소(장)년기를 보냈던 40~50대 관객들로서는 자신의 ‘소시적’을 다시 만나는 듯한 심정이 들 법하다. 우선 나 자신부터 그랬다. 영화 속에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선율이 흘러나올 때 나 자신의 지난날이 흠씬 묻어있는 듯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나 혼자만의 경험이었을까? 좀 유식하게 말하면, 퀸의 음악은 ‘환유적으로〔인접성〕’ 나의 지난 시절을 일깨우고, 그간 덧없이 흘러간 시간을 보내고 난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반사적 효과를 자아내는 셈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나? 요즘이야 가수가 되려면 노래 실력만큼이나 비주얼이 뒷받침돼야 하는 시대라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비주얼은 떨어져도(?) 가창력이 받쳐주면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던가?. 당시라면, 요즘의 아이돌 그룹은 가수 축에도 끼기 힘든... 일이었을 게다... 이 영화가 젊은 관람객에게는 부모 세대의 음악을 '발견'하는 계기일 수 있고, 또 부모 세대 관람객에겐 향수에 젖어 지난날을 돌이키는 ‘재발견’의 계기가 됨직하다.

음악을 즐길 뿐 문외한인 나로서는 사실 그룹 ‘퀸’이 가진 음악적 역량이나 맥락을 따질 능력이 전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하는 프레디 머큐리는 그야말로 음악에 ‘올인’하는 예술가의 전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빼어난 가창력(4옥타브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을 가진 가수가 혼신을 다해 음악에 몰입할 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처절할 정도로 감동적이고, 그 전염력은 남다른 것일 테니 말이다. 이를테면 그림을 그릴 때의 반 고흐가 그랬을 것이고, 시를 쓸 때의 랭보가 그랬을 것이다. 또 다른 빼어난 ‘토탈 아티스트’인 레이디 가가도 퀸(특히, 프레디 머큐리)을 너무나 흠모한 나머지 그의 노래 ‘라디오 가가’(라디오의 웅웅 대는 소리)를 본떠 자신의 예명으로 삼았다고 한다(여기엔, 기존질서의 엄숙성에 대한 반항이 숨어 있기도 하다).

요컨대, 이 영화의 성공비결은 바로 마법을 거는 듯한 퀸의 음악에 있는 듯이 보인다. 영화 말미에 소개되는 ‘라이브 에이드’ 장면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는 음악을 하기 위해 태어난 신동 내지는 신들린 무당처럼 그려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음악만으로 지금처럼 중년의 관객들이 열광하는 까닭을 설명하기엔 부족한 듯 보인다. 하루종일 음악을 곁에 두고 지내는 나의 경우 그간 음악영화라면 어지간히 봐왔다고 자부하지만, 요즘과 같은 기현상은 일찍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특히 중년의 관객들이 이 영화에 깊이 빠져드는 까닭이 퀸 음악의 강렬한 호소력만큼이나, 주인공인 프레디 머큐리에게 무의식적으로 동일화(同一化)하고 또 그를 이상화(理想化)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째서일까? 무엇보다 먼저, 프레디 머큐리란 인물은 철두철미 ‘변경인’으로 그려진다. 국적으로 보자면 영국인이지만, 거무스름한 피부색을 가진 이란계 동양인이고, 지금은 아프리카 대륙의 탄자니아 땅인 잔지바르란 구 영국 식민지에서 태어났다. 그뿐 아니라, 어려서는 인도로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한 조로아스타교 신자이고, 그 후 또다시 영국으로 건너와 정착한 이주 노동자의 자식이다. 한마디로, 좋게 말하면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주류사회로부터 천대받기 십상인 변경인으로서의 자격을 고루 갖춘 셈이다. 게다가, 보기 흉한 뻐드렁니 탓에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놀림감이었다고 전해진다... 프레디 머큐리의 대표곡이자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보헤미안(집시) 랩소디〉는 문자 그대로 세상의 변경을 떠도는 보헤미안인 프레디 머큐리 자신을 가리키며(더욱이, 집시의 기원은 인도이다), 이 같은 존재의 아픔을 광기 어린 음악(‘광시곡狂詩曲’) 을 통해 떨쳐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도 그랬지만 영화 속에서도 프레디 머큐리가 양성애자였다는 사실 또한 문제의 인물이 변경인임을 한층 강조한다. 영화에서도 잘 그려지고 있듯이, 성별을 분간하기 힘든 복장을 즐기고 겉치레·외모에 남다른 관심을 쏟는 등의 태도는 남성 동성애자의 전형적인 행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룹 이름인 ‘퀸’이란 단어가 그곳 사람들에게는 ‘게이’를 지칭하는 은어란 사실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프레디 머큐리가 무대에 설 때마다 기다란 막대 마이크를 선호했다는 점도 이런 사실과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퀸의 실제 ‘라이브 에이드’ 영상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가 막대 마이크를 거머쥐고 동성애 성행위를 그대로 흉내 내는 장면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주류사회에 진입하지 못하고 변경에서 떠돌아야만 했던 프레디 머큐리야말로 어느새 나이 들어 젊은 날의 꿈을 잃어버린 지금의 가련한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현재의 내 모습이 처량하면 할수록 그와의 동일화는 더욱더 강력하게 작동할 테니 말이다. 내 가슴을 후벼 파는 그 광기 어린 절규야말로 처량한 지금의 내 심정을 목청껏 외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열심히 살았던가? 좋았던 그때 그 시절은 다 어디로 가버렸나? 우리 사회가 ‘나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닌가? 반면에, 그가 변경인인 주제에 너무나 당당하고 감히 흉내 내기조차 힘들 정도로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한다는 점에서 볼 때 동일화는 멈추고 이번엔 이상화(idealization)가 작동한다. 이상화란 보잘것없는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해 대상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자아의 방어기제 중 하나이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의 다친 마음이 어루만져지고, 쪼그라든 지금의 내 모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니 말이다. 10만 군중을 열광케 하는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는 지금 내가 갖고는 싶지만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그런 목소리이다. 사실, 내 목소리는 아름답지도 않을뿐더러, 어쩌면 그간 힘겹고 신산한 세상살이에 시달리느라 목소리 자체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웅인 줄 알았던 우리는 어쩌다가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버렸는가?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

요사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제까지 이 영화를 관람한 누적관객수가 9백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이미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둔 셈이지만, 이처럼 예기치 못했던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만큼이나 다른 흥행영화에서와는 다른 특이점들이 눈에 띈다. 어째서 관객들은 이 영화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그것도 젊은 관객들 못지않게 나이 지긋한 중년의 관객들이 관람석을 가득 메우고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론 정신줄을 놓고 춤을 춰가며 떼창을 부르기도 한다니, 이 영화엔 분명 특별한 뭔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 영화가 개봉된 이래 중년남성들의 악기 구입이 폭증하고 있다는 소식 또한 이 영화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보다 우리나라의 영화 관람객 수가 더 많다고 하니, 여기엔 뭔가 한국적인 상황에 호소하는 뭔가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게 뭘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영화는 1960~1980년대 전 세계 대중음악계를 주름잡았던 영국의 보컬그룹 ‘퀸’, 특히 이 그룹의 리드싱어였던 프레디 머큐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기영화이면서, 이들이 불렀던 곡들의 선율이 영화 전편에 걸쳐 풍성하게 흐르는 음악영화이다. 그룹의 전성기에 발표됐던 ‘보헤미안 랩소디’나 ‘라디오 가가’, ‘우리는 챔피언’ 등의 노래가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면 그 당시 이 음악을 들으며 청소(장)년기를 보냈던 40~50대 관객들로서는 자신의 ‘소시적’을 다시 만나는 듯한 심정이 들 법하다. 우선 나 자신부터 그랬다. 영화 속에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선율이 흘러나올 때 나 자신의 지난날이 흠씬 묻어있는 듯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나 혼자만의 경험이었을까? 좀 유식하게 말하면, 퀸의 음악은 ‘환유적으로〔인접성〕’ 나의 지난 시절을 일깨우고, 그간 덧없이 흘러간 시간을 보내고 난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반사적 효과를 자아내는 셈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나? 요즘이야 가수가 되려면 노래 실력만큼이나 비주얼이 뒷받침돼야 하는 시대라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비주얼은 떨어져도(?) 가창력이 받쳐주면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던가?. 당시라면, 요즘의 아이돌 그룹은 가수 축에도 끼기 힘든... 일이었을 게다... 이 영화가 젊은 관람객에게는 부모 세대의 음악을 '발견'하는 계기일 수 있고, 또 부모 세대 관람객에겐 향수에 젖어 지난날을 돌이키는 ‘재발견’의 계기가 됨직하다.

음악을 즐길 뿐 문외한인 나로서는 사실 그룹 ‘퀸’이 가진 음악적 역량이나 맥락을 따질 능력이 전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뿐 아니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하는 프레디 머큐리는 그야말로 음악에 ‘올인’하는 예술가의 전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빼어난 가창력(4옥타브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을 가진 가수가 혼신을 다해 음악에 몰입할 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처절할 정도로 감동적이고, 그 전염력은 남다른 것일 테니 말이다. 이를테면 그림을 그릴 때의 반 고흐가 그랬을 것이고, 시를 쓸 때의 랭보가 그랬을 것이다. 또 다른 빼어난 ‘토탈 아티스트’인 레이디 가가도 퀸(특히, 프레디 머큐리)을 너무나 흠모한 나머지 그의 노래 ‘라디오 가가’(라디오의 웅웅 대는 소리)를 본떠 자신의 예명으로 삼았다고 한다(여기엔, 기존질서의 엄숙성에 대한 반항이 숨어 있기도 하다).

요컨대, 이 영화의 성공비결은 바로 마법을 거는 듯한 퀸의 음악에 있는 듯이 보인다. 영화 말미에 소개되는 ‘라이브 에이드’ 장면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는 음악을 하기 위해 태어난 신동 내지는 신들린 무당처럼 그려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의 음악만으로 지금처럼 중년의 관객들이 열광하는 까닭을 설명하기엔 부족한 듯 보인다. 하루종일 음악을 곁에 두고 지내는 나의 경우 그간 음악영화라면 어지간히 봐왔다고 자부하지만, 요즘과 같은 기현상은 일찍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특히 중년의 관객들이 이 영화에 깊이 빠져드는 까닭이 퀸 음악의 강렬한 호소력만큼이나, 주인공인 프레디 머큐리에게 무의식적으로 동일화(同一化)하고 또 그를 이상화(理想化)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째서일까? 무엇보다 먼저, 프레디 머큐리란 인물은 철두철미 ‘변경인’으로 그려진다. 국적으로 보자면 영국인이지만, 거무스름한 피부색을 가진 이란계 동양인이고, 지금은 아프리카 대륙의 탄자니아 땅인 잔지바르란 구 영국 식민지에서 태어났다. 그뿐 아니라, 어려서는 인도로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한 조로아스타교 신자이고, 그 후 또다시 영국으로 건너와 정착한 이주 노동자의 자식이다. 한마디로, 좋게 말하면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주류사회로부터 천대받기 십상인 변경인으로서의 자격을 고루 갖춘 셈이다. 게다가, 보기 흉한 뻐드렁니 탓에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놀림감이었다고 전해진다... 프레디 머큐리의 대표곡이자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보헤미안(집시) 랩소디〉는 문자 그대로 세상의 변경을 떠도는 보헤미안인 프레디 머큐리 자신을 가리키며(더욱이, 집시의 기원은 인도이다), 이 같은 존재의 아픔을 광기 어린 음악(‘광시곡狂詩曲’) 을 통해 떨쳐버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도 그랬지만 영화 속에서도 프레디 머큐리가 양성애자였다는 사실 또한 문제의 인물이 변경인임을 한층 강조한다. 영화에서도 잘 그려지고 있듯이, 성별을 분간하기 힘든 복장을 즐기고 겉치레·외모에 남다른 관심을 쏟는 등의 태도는 남성 동성애자의 전형적인 행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룹 이름인 ‘퀸’이란 단어가 그곳 사람들에게는 ‘게이’를 지칭하는 은어란 사실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프레디 머큐리가 무대에 설 때마다 기다란 막대 마이크를 선호했다는 점도 이런 사실과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퀸의 실제 ‘라이브 에이드’ 영상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가 막대 마이크를 거머쥐고 동성애 성행위를 그대로 흉내 내는 장면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주류사회에 진입하지 못하고 변경에서 떠돌아야만 했던 프레디 머큐리야말로 어느새 나이 들어 젊은 날의 꿈을 잃어버린 지금의 가련한 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현재의 내 모습이 처량하면 할수록 그와의 동일화는 더욱더 강력하게 작동할 테니 말이다. 내 가슴을 후벼 파는 그 광기 어린 절규야말로 처량한 지금의 내 심정을 목청껏 외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열심히 살았던가? 좋았던 그때 그 시절은 다 어디로 가버렸나? 우리 사회가 ‘나이’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닌가? 반면에, 그가 변경인인 주제에 너무나 당당하고 감히 흉내 내기조차 힘들 정도로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한다는 점에서 볼 때 동일화는 멈추고 이번엔 이상화(idealization)가 작동한다. 이상화란 보잘것없는 자기 자신을 감추기 위해 대상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자아의 방어기제 중 하나이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의 다친 마음이 어루만져지고, 쪼그라든 지금의 내 모습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니 말이다. 10만 군중을 열광케 하는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는 지금 내가 갖고는 싶지만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그런 목소리이다. 사실, 내 목소리는 아름답지도 않을뿐더러, 어쩌면 그간 힘겹고 신산한 세상살이에 시달리느라 목소리 자체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웅인 줄 알았던 우리는 어쩌다가 일그러진 영웅이 되어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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