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가짜 웃음
등록일:2019-04-23, 조회수:121
화요일의 심리학 - 정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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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종류의 가짜가 횡행하는 세상이니만큼 웃음이라고 가짜가 없을 리 없다. 이른바 억지웃음, 가짜 웃음이 그렇다. 백화점의 안내 데스크나 상점 등에서 점원이 손님에게 내보이는 웃음이 처음엔 반갑고 따듯하게 여겨지다가도 내 뒤의 손님을 맞이하면서 처음 웃음을 거두고 다시금 새로운 웃음을 기계적으로 지어대는 양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기분이 상하고 내가 ‘상술’에 놀아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순 없으나,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래도 이런 가짜웃음은 우리나라에서보다 여느 선진국에서 좀 더 자주 접했었던 것 같다. 그 까닭은, 우리나라의 상점들에선 아예 손님들에게 억지웃음조차 짓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하는 경우가 좀 더 잦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짜웃음은 이를테면 얼굴 위에 잠시 가면을 뒤집어쓰거나 본 얼굴을 가릴 목적으로 위장용 필터를 얹어놓은 격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이 같은 직업상의 거짓웃음(서양에서는 이런 미소를 흔히 ‘팬암 미소’라 부른다. 팬암은 미국의 대표적인 항공사이다...) 말고도, 우리 스스로 이와 같은 억지웃음을 지어야 할 때가 있으니, 바로 사진을 찍을 때이다. 사진사가 ‘김치’ 혹은 ‘치즈’를 구령하면,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그럴 듯한 가짜웃음을 짓지 않는가. 거짓웃음이 사진 찍을 때의 그 어색한 순간을 가리기엔 좋지만(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제스처도 그런 책략의 하나일 것이다), 사실 나중에 사진이 되어 나오면 자신의 가짜 미소에 만족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얼굴 표정이나 몸짓을 짐짓 꾸밀 수는 있을지언정,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가장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20세기 최고의 사진가로 평가받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한 인물의 초상사진을 찍기 위해 여러 날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건지기가 힘들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아무런 ‘연출’ 없이 마침내 성공한 그의 초상사진에는 누구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힘이 담겼다. 나는, 사진을 통해 나타나는 우리 자신의 ‘진면목’이 어떤 것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수 백, 수 천의 미세한 디테일이 조합하여 만들어내는 자연스런 어떤 것이란 데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연예인 개개인이 가진 그 사람만의 매력을 기가 막히게 사진으로 잘 포착한다고 알려진 사진작가가 있다. 나야 물론 연예인은 아니지만, 여건만 된다면 그 사진작가에게 나 자신을 한 번 맡겨 보고 싶다. 나의 ‘참모습’이 어떤 것인지 정말로 궁금한 까닭에...

한편, 종잡기 힘들 정도로 변화무쌍한 표정이나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히스테리’ 환자들이다. 여느 사람들에겐 별일도 아닌 일로 감정을 폭발시킨다거나 뜬금없이 웃거나 흐느껴 우는 등의 과잉반응을 나타내는 남다른 감수성의 소지자들이다. 오늘날의 정신의학에서는 이 같은 부류의 인성(人性)을 히스테리란 말 대신, ‘연극성 성격장애’란 용어로 지칭한다. 마치 연극배우가 무대에서 그러하듯, 언제 어떤 맥락에서 표정을 짓거나 가장하고 또 변신을 꾀할는지 짐작하기 힘든 까닭에서이다. 마치 뿌리 뽑힌 부평초마냥 물 흐르는 대로 이리저리 부대끼며 부유하는 특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같은 ‘히스테리’ 현상이 특정 부류에 국한하지 않고, 보통사람들의 인성 구조와 동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자아’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을 꼬집는 말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정신의학계에서도 우리의 ‘자아’가 실체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란에 대해 아직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있지 못하다. 극한적으로, 라캉 같은 정신의학자는 우리의 자아가 주로 시각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에서 비롯하고 ‘타자’에 의해 지탱되는, 허깨비같은 존재라고 말한다(「거울의 단계」)... 요즘 들어, 젊은 여성이 한 손에 휴대폰을 든 채 자신의 모습을 찍는 사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어째서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어야만 하는가? 그저 ‘자뻑’일 뿐인가? 아니면, 빠뜨릴 수 없는 소도구처럼 한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은 바로 자신의 자아를 비추고 자아의 환상을 지탱해줄 거울(타인의 시선)이 아닐까?

이와는 반대로, 본래의 자기 모습이 아닌 이물질이 우리의 자아를 두껍게 덮고 있는 경우들도 있다. 마치 굴이나 홍합 껍질 위에 소라나 해초류가 단단히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컨대, 일단의 여배우들 중에 내가 ‘요조숙녀 증후군’이라 부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진 부류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조신한 요조숙녀로 처신해야 한다고 학습되었거나 “키워진”(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표현이다) 탓에, 선량한 역이 아닌, 거친 역이나 악역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는 부류를 일컫는다. 사회인으로서야 환영받아 마땅하지만, 불량배마냥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지도 담배연기를 불량스럽게 뿜어내지도 못한다면 배우로서는 치명적이다. ‘공무원 증후군’도 존재할 법하다. 물론 일반화할 순 없지만, 일부의 공무원 중에 유난스레 몰개성으로 무장한 모습이 특징적으로 눈에 띄기 때문이다. 희끄무레한 무채색 복장에 개성도 표정도 없는 까닭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일까?

가짜와 상업주의가 판치는 오늘날 가짜웃음, 가짜울음만이 넘쳐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요사이 TV 프로그램의 적지 않은 부분을 채우는 예능프로나 ‘리얼리티 쇼’에는 은밀해야 할 사연들이 공개적으로 까발려지고 조작되고 있다. 상품을 매개로 남녀 간의 사랑이 맺어지거나 가족 간의 사랑이 봉합되고, 개인의 가장 내밀한 욕망과 고뇌가 표면에 돌출하여 이야깃거리나 볼거리로 전락하고 있으니, 우리의 허약한 자아를 파고드는 거대한 「트루먼 쇼」가 어느새 우리 곁에 도래한 듯하다. ‘리얼리티 reality’, ‘트루 true’ 따위의 말이 넘쳐나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우리가 여전히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오리무중 속에 살고 있음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짜 웃음, 가짜 울음을 가장하고 짐짓 표정을 꾸미는 까닭은 바로 우리의 자아가 허약하고 또 우리가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가짜 웃음을 짓는다... (세상을 향해) 내가 살아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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