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칼럼

연속극 보는 남자
등록일:2019-12-10, 조회수:370
화요일의 심리학 - 정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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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 말해보라. 그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리라”란 서양 격언이 있다.

삶의 지혜가 담긴 말이 아닐 수 없다. ‘나’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 근거를 나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내 주변에서 찾으려 할 때, 오히려 우리 자신의 참모습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대단한 통찰력이 담긴 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기 미화를 멀리하고, 검열을 에두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보고자 한다. “우리 사회가 어떤 TV 연속극을 보는지 말해보라. 그럼,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말해주리라...”

아침 출근시간대에서부터 자정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TV 채널(얼마 전까진 몇몇에 불과했지만, 이젠 수십, 수백 개에 이른다!)마다 빼곡하게 방영하는 TV 드라마야말로 우리가 함께 울고 웃는, 이제는 우리의 삶에 빠뜨릴 수 없는 동반자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TV 연속극 공화국이라 불릴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TV 방송이 시작된 이래 수십 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지고 발전해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한류’를 이끄는 원동력으로까지 평가받고 있지 않은가? 한때 TV 연속극 망국론이 언급되었던 적이 있었다.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기존의 가치들을 고수하는 역할만 반복할 뿐이란 논지에서였다. 사실상 적지 않은 TV 연속극들이 여전히 가족의 비밀이나 ‘남녀상열지사’, 가난한 집 자식과 부유한 집 자식 간의 결합을 둘러싼 우여곡절을 드라마의 주된 뼈대로 삼고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TV 연속극이 이토록 질긴 생명력을 지닌 채 발전을 거듭하기까지에는 시청자들의 전폭적이고도 한결같은 호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 개인적인 소견을 좀 더 밝히자면, TV 연속극이 가진 가장 커다란 임무는 새로운 가치관 창출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가진 열망이나 욕구 및 욕망을 어루만지고 다독거리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잠을 자야 하듯이, 대중이 자신의 열망이나 욕망을 간접적으로나마 표출하고 펼쳐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야말로 TV 연속극이 가진 가장 커다란 순기능인 듯하다. 이런 까닭에 TV 연속극이야말로 그 어떠한 사회학적 연구나 정치적 고담준론보다도 우리 사회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거울일 수 있다.


한편, TV 드라마마다 재벌집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의사, 검사, 변호사 등 사(士) 자로 끝나는 ‘평균 이상’의 사회 엘리트층이 등장인물의 주를 이룬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일반대중의 열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바로 신분 상승 욕구이다. 실제 현실에서라면 우리가 재벌 2세를 친구나 연인으로 둘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고 또 집안 식구 중에 ‘사’자로 끝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예외적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TV 연속극에 사회적으로 평균 이상으로 잘난 인물들이 넘쳐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꿈’, 우리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더불어, 이처럼 특출 난 등장인물들이 전형(典型)에서 벗어난 채 그려진다 하더라도, 시청자의 눈높이에서는 여전히 전형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복잡한 문학작품에서와는 달리, TV 드라마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시청자가 동일화하기 쉬운 전형이나 엘리트 직업군을 선호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대신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변호사며, 재벌 집 자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하게 된 주인공이 결국 자신이 자라난 서민가정으로 되돌아간다는 식의 설정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우리가 내심 갈망하는 지위를 가졌으되 현재의 초라한 내 모습이 쉽게 동일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볼 때 변형된 전형으로 기능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 또한 필자 자신의 개인적인 소견이긴 하지만, 드라마를 통해 나타나는 신분 상승의 정도가 다른 나라들에서보다 유독 심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욕구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보다 많은 명예와 안락함을 누리고, 또 자기 모습을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욕구 내지 욕망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모두의 정신을 밑바닥에서부터 지탱하는 가장 커다란 부분은 바로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나르시시즘 하면 ‘왕자병’, ‘공주병’을 먼저 연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 이는 자아 과잉에 따른 성격장애의 유형들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정신의학에서 바라다 볼 때는 맥락이 사뭇 다르다. 나르시시즘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또 발전해 나아가는 핵심이자 버팀대이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에선 나르시시즘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일차적 나르시시즘”이라 부르는 원시적 형태의 나르시시즘으로, 우리의 자아가 탄생하는 ‘신화적’ 차원의 형태이다. 두 번째는 “이차적 나르시시즘”이라 불리는 것으로, 통상적인 의미의 나르시시즘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미 만들어진 ‘나’란 바탕 위에 끊임없이 외부요인들이 추가됨으로써 점점 더 발전된 형태의 ‘나’, 혹은 자아 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TV 연속극은 시청자의 채워지지 못한 ‘나르시시즘’을 어루만지고 얼러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의문은 남는다. 예컨대, 어째서 우리나라의 TV는 다른 나라들에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연속극들이 넘쳐나는가? 또는, 어째서 우리나라의 TV 연속극에서는 신분 상승이란 주제가 그토록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것일까? 필자 개인으로선 첫 번째 질문에 답할 역량은 못되지만, 두 번째 질문에는 나름대로 몇몇 심리학적 설명을 제시해볼 수 있다. 바로 우리 사회가 가진 특유의 문화적 속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우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호프스테드의 문화차원이론에 따르면, 그가 제시한 다섯 가지 범주 중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권력 간격’과 ‘개인주의-집단주의’의 척도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권력 간격이란 조직 내 권력불평등을 하급자들이 용인하는 정도를 뜻한다. 요컨대,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적 사회로 조사됐다.

한편, 개인주의-집단주의 범주는 사회구성원이 집단을 우선시하는가, 개인을 우선시하는가에 대한 척도를 말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집단주의의 수치가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로 분류된다. 다시 말해, 문화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권위 중심적이며, 개인보다는 집단을 우선시하는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라로 조사됐다. 유사한 맥락에서, 2011년 미국 메릴랜드 대학 심리학 연구팀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 가장 경직된 나라 중 하나로 조사됐다. 그 원인은? 동일 연구팀에 의하면, 조밀한 인구밀도, 자원 부족, 잦은 외부와의 전쟁, 자연재해와 질병 등이 꼽힌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한 인구조밀국이란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격심한 경쟁심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귄위주의적 사고방식에 따른 사회적 억압이 상대적으로 강한 문화적 특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이 같은 환경적 여건에 역사적인 요인까지 가세하는 듯하다.

예컨대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반을 둔 조선사회의 양반제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차별적인 사고방식이 현대에 이르러서도 어느 정도 여전한 것은 아닌가? 예를 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20대의 새파란 판검사를 일컬어 “영감”이라고 부르던 시대가 있었다(본래 ‘영감’이란 말은 조선시대에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을 일컫는 존칭이었다). 이 또한 뼈아픈 지적이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다"란 말이 있지만 이 말 또한 일종의 '부인 negation'의 기제가 발동하는 말로서, 여전히 우리 사회엔 직업에 귀천이 존재함을 암시하는 듯하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TV 연속극이야말로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온갖 종류의 차별과 질시에 대한 비판이며 고발은 차치하고서라도, 오늘날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갑질 논란이나 수저론을 놓고 보면, 이는 역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권위주의와 서열 및 위계질서 의식에 젖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은 아닐까? 수저론만 해도 그렇다. 본래 이 말은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란 서양격언에서 탄생한 말이다. 고귀한 신분을 타고난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 사회에 편입되면서 ‘은수저’뿐 아니라, ‘금수저’며 ‘흙수저’란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냈다. 출생과 환경에 따른 차별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 자체가 서열의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우리 사회구성원들의 속내가 얼마나 복잡한가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신분 상승 욕구는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어쩌면 극심한 차별과 질시에 대한 반발의 표현일 수 있다.

나는 오늘도 TV 채널을 돌려본다.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엿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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