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일기

미리 읽는 책 한 쪽┃<알아차림의 힘>_치유가 필요한 시대, 잠시 멈추어 서다
등록일 : 2015-04-02
트위터로 공유하기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미투데이로 공유하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실 그대로인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과장 또는 조작된 것들이 넘친다.
보여지는 것에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지 않는가? 보여지는 것에 가려져
우리가 놓치는 것은 무엇인가?”


촉각,
세상을 만지다


우리 몸의 외피는 밖의 세계와 닿을 수 있도록 열려 있다. 걸어 다니는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털을 입지 않고, 부드러운 피부로 섬세하게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 있을 때 이미 태아는 온몸의 피부로 양수를 접촉한다. 태어나면 아기는 손끝으로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고 입으로 젖꼭지를 빨면서 세계를 경험한다. 촉감은 아기에게 부드러움과 딱딱함, 따뜻함과 차가움, 아픔과 편안함의 정보를 전달한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접촉으로 편안함을 경험하는 아기는 감각으로 안다. “세상은 살 만한 곳이구나.”

아기들은 품에 안겨 온몸에 닿는 느낌으로 사랑을 경험한다. “너의 어머니는 사랑이 넘치는 분이란다.”는 말은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아기들은 촉감으로 만나주지 않으면 아무리 잘 먹여도 불안해하고,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서양 문화권에서는 생존을 위해 하루 적어도 네 번의 허그를 해야 한다고 한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예의로 여기는 문화에서는 접촉에 더 인색하다. 허그로 가슴의 피부에 접촉할 때 사랑의 호르몬이 분비되어 가슴의 따뜻함이 살아난다.

촉감은 우리가 만지는 대상의 성질, 온도와 강도와 재질에 관한 정보를 준다. 이 세상에 얼마나 다른 독특한 물질들이 있는지, 그것들이 제각각의 모양과 기능으로 나와 함께 있음을 새삼 알아차린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지극히 적절하게 제자리에 있음을 발견한다. 단단한 나무는 도마로, 강철은 칼이 되어, 부드럽지만 구우면 단단해지는 흙은 그릇이 되어 있다. 흐르는 물은 그 부드러운 침투력으로 무엇이든 씻어낸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수박은 매끈매끈 단단하다. 이빨도 들어가지 않고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사인도 없는 원구이다. 단단하고 두꺼운 껍질은 부드러운 속살을 지키는 방어막이다. 껍질만 만져본 사람이 있다면, 수박이 딱딱해서 이빨도 안 들어가는 이상한 물건이라 할 것이다. 딱딱함은 그 속에 부드러움이 있다는 신호이고 질김은 무른 살과 주스가 있다는 신호이다. 딱딱함에도 질김에도 이유가 있다.

은행의 속껍질은 구린내 나고 물컹물컹한 외피로 뒤덮여 있다. 그러나 외피를 물로 깨끗이 씻어내면 단단한 럭비공 모양의 내피를 만나게 된다. 껍질만 보고 왜 이렇게 구리고 물컹거려, 왜 이렇게 단단해, 하며 포기하는 사람은 은행의 에센스를 경험하지 못한다. 식물성 지방이 풍부한 은행이나 잣이 쉽게 열렸다면, 공기와 접촉하여 산화되었으리라. 여러 재질의 방어막이 겹겹이 있는 것은 지극히 적절하다. 핵심을 만나는 데 여러 겹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자연세계에 있는 것들은 그저 적절할 뿐, 좋거나 좋지 않음이 없다.

만져지는 것들은 변화의 속도가 다를 뿐 다 변한다. 뽀송뽀송하던 피부는 어느새 주름 잡히고 거칠어진다. 보드라운 진달래는 봄비에 스러진다. 그러나 이 순간 이 모습으로 있음으로 존재세계는 그만큼 밝아져 있다. 우린 촉각으로 세상을 흡수하는 데 인색한가 너그러운가? 인쇄물과 씨름하며 사는 사람들일수록 시각과 청각으로 세계를 흡수하는 데 길들여져 있다. 시청각 중심의 교육은 이런 습관을 더욱 강화한다. 세계의 풍요를 수용하지 못하니 밖은 풍요인데 나는 문 닫고 빈곤하게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오늘은 촉감으로 세계를 만나본다.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내 앞에 있는 것, 내가 만지는 것들의 느낌을 가져본다. 수돗물을 내릴 때, 야채를 씻을 때, 과일을 만질 때 잠시 멈춘다. 힘을 주지 않고 부드럽게 다시 만진다.




춤,
이 순간의 나를 표현하다



누구나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부터 춤춘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춤을 가지고 나온다. 자의식이 생기기 이전의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순간의 흥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춤추는 아이, 우리 안에 그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가르치는 고상한 언어를 학습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안, 몸의 언어는 잠재의식 속에 숨어버린다.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자아
화내면 안 된다고
그러면 싸우게 된다고.
울면 안 된다고
울면 바보라고

춤추면 안 된다고
천박한 사람이라고
그냥 말로 하라고
점잖게 조용히.

(- 길들여진 자아)


말은 절제되고 훈련된 표현 방법이다. 말은 의식의 표면에 떠오른 것만을 표현한다. 춤은 근육의 조직과 신경회로에 저장된 기억과 상처를 스스로 풀어낸다. 대뇌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몸이 알고 있다. 분노, 두려움, 억울함, 수치심이 이제 우울이 되어, 대상을 잃어버린, 이름붙일 수 없는 답답함이 되어 있다. 이미 몸속에 갇힌 감정을 몸이 알아서 풀어내게 한다. 몸이 몸의 언어로 말하게 한다. 몸은 머리로 지각한 슬픔이 아니라 가슴으로 경험하는 슬픔, 몸이 경험한 억울함을 말한다. 말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충분히 느껴주어, 그 뜨거운 가슴의 용광로에 감정이 녹아져 흘러나가, 몸이 놓여나게 한다.

형식이 있어서 그 형식을 외워 연습해야 되는 춤이 아니라, 순간의 자유로운 움직임인 춤,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움직임 자체가 목적인 춤, 누군가의 몸짓을 따라하는 움직임이 아닌, 기억 속의 움직임의 재생이 아닌, 이 순간 고유 동작인 춤은 바로 의식이 알아차리지 못한 채 풀어져 나오는 무의식의 표현이다. 고유동작은 내 존재의 상태를 바꾸어놓는다.

몸이 근육의 언어를 말할 때, 딱딱하게 뭉친 오래된 긴장이 부드러움으로 풀어져 나온다. 몸이 신경의 언어로 춤출 때, 의식과 무의식에 침전된 복잡한 감정들을 흘려보내는 정화의 강이 된다. 몸이 세포와 원자와 양자의 진동으로 춤출 때, 마침내 자유와 기쁨의 자연 상태로 돌아온다. 춤추는 자신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두 팔 벌려 한껏 위로 날아오르는 몸, 어떤 틈바구니에도 낄 수 없는 자유로운 몸, 그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 신난다. 우리 안의 신이 살아나온다.

나는 얌전하거든
그 얌전의 패턴을 깬다.

움직임을 지독히 싫어하거든
그 싫어함의 패턴을 깬다.

나는 남들 보는 곳에선 꼼짝 못해
그 답답함의 패턴을 부숴버린다.

어깨에게 자유를
팔꿈치와 손가락에게 자유를

다리와 발에게 자유를 준다.
뛰는 심장이 뛰게 한다.

(- 패턴 깨기)



*<알아차림의 힘>은 4월 중순에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