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일기

책 밖에서 만난 작가┃<이종건의 생활+세계 짓기> 시리즈를 쓴 건축 비평가 이종건 인터뷰
등록일 : 2017-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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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종건의 생활+세계 짓기’ 시리즈 삼부작, 『시적 공간』, 『살아 있는 시간』, 『깊은 이미지』가 완성되었습니다. ‘공간’, ‘시간’, ‘이미지’라는 단어에 천착해 논의를 이끌어간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A  ∥ 인간의 모든 삶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펼쳐집니다. 시간과 공간은 실존의 조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화로 말을 걸 때 첫 마디로 ‘어디니?’라고 묻습니다. 어디 있는지 아는 것만큼 그 사람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잘 알려주는 정보는 없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발생한다(taking place)라는 낱말이 가리키듯, 우리 삶의 모든 사건들은 장소에서 발생합니다. 독일 철학자 피터 슬로터다이크는 공간이 귀신(demon)처럼 우리가 모르게 막강한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예컨대 우리가 집을 지을 때 그로써 창조된 공간이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귀신처럼 들러붙는다고 합니다.

시간은 하이데거가 말했듯 존재의 근본 토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 속에 각자의 시간만큼 살다 죽습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실존을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숙고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로, 막강한 이미지의 힘 속에 살아가야 하는 시대이니,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그만큼 현대를 좀 더 깊이 좀 더 가치 있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Q
 
∥ 이번에 펴내는 세 번째 권, 『깊은 이미지』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집필하게 되었는지요?
A   기 드보르(1931~1994)가 일상의 모든 영역을 점령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스펙터클의 사회』를 내어놓은 지 딱 50년이 지났습니다. ‘스펙터클’이란, 자본이 이미지가 될 정도로 집적된 상태, 혹은 이미지가 자본이 될 정도로 집적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사회가, 그리고 그 사회 속에 사는 우리가, 이미지에 잠식되어 자본의 장단에 춤추는 꼴이 되어가는 것을 예고하고 경계했다고 할 수 있는데, 시장의 구도를 신자유주의가 장악한 작금은 그러한 상태가 더 강하면 강해졌지 약해졌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미지는 이제 우리가 사는 집 안팎과 상관없이 ‘무소부재’합니다. 광고가 없는 공간이나 장소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마저 이미지가 좌지우지하는 형국입니다. 막말과 가짜뉴스도 난무합니다. 그러다보니, 나라를 경영할 사람들을 잘 고르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우리는 정치인들의 선동적 발언과 이미지 공학이 노리는 대로, 특히 불안의 감정에 휩싸여 비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기 쉽습니다. 역사적 사건이라 부를 만한 촛불집회의 힘도 자칫하면 그러한 선동과 선전에 휘둘릴 수 있습니다. 뉴스를 포함해 우리가 접하는 모든 이미지는 날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입니다(인간이 만든 것은 모두 특정한 의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혹은 알아도 쉽게 잊습니다.

우리는 침대에서 눈을 뜨고 다시 누워 잠들기 전까지 매순간 알게 모르게, 점점 일상화되어 심지어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사방에서 (광고) 이미지의 융단폭격을 받으면 삽니다. 세상의 모든 이미지가 우리의 몸처럼 심지어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 뼘이나마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이미지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우리 자신조차 제대로 지키기 어렵습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닦달하는 소비사회에 이끌려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우리가 결코 원치 않는 방식으로 낭비하기 십상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심지어 우리의 욕망조차 진실로 우리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Q ∥ 이미지만큼 중요한 홍보 수단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치영역마저 가짜뉴스, 이미지 정치가 판치고 있는데, 미국의 대선 후보 트럼프는 합리적 이성과 진실보다는 ‘강한 미국’을 되찾아오겠다는 강력한 감정적 호소로 대중들에게 어필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논란이 된 가짜뉴스 역시 이미지 정치의 한 사례라고 책에서 언급했습니다. 이런 가짜뉴스, 이미지 정치가 왜 문제인가요?
A  ∥ 가짜뉴스는 우선 진짜가 아니라서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두 진짜를 원하니까요. 우리는 가짜를 원할 때조차, 그것이 ‘진짜’ 가짜라고 생각합니다. 속임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진짜-가짜 구별은 쉽지 않습니다. 가짜는 진짜보다 더 진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짜는 설령 가짜처럼 보여도 진짜인 까닭에 굳이 진짜로 보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지만, 가짜는 진짜로 보이지 않으면 곧바로 외면받기 때문입니다.

이미지 정치의 문제는 그것이 외양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태를 오직 외양의 문제로 몰고 갈 가능성이, 삶에, 생명에 핵심인 실제적인 것을, 진짜 중요한 삶의 본질을 놓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는 우리를 쉽게 현혹해서 우리가 진짜 내용을 볼 수 없게 만들고, 결국 짧은 시간 눈의 유혹으로 긴 시간 큰 손해를 입힙니다. 우리가 정치인들에게서 진실로 원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알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듣는 것이 이미지라는 사실에는 주의하지 않습니다.


Q ∥ 2016년 10월부터 2017년 3월까지, 대한민국 광장은 주말이 되면 촛불 든 시민들로 완전히 새옷을 입었습니다. 장소와 공간에 남다른 감각을 지닌 건축인으로서 광장의 이런 변신이 어떻게 다가왔는지 궁금합니다. 촛불집회를 보며 느낀 소회가 있다면요?
A   독재정권 시절, 전체주의 시대에 권력을 현시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하는 프로파간다 공간이었던 텅 빈 공간이,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의 정치공간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특히 이번의 집회는 비폭력적이어서 더 위력적이었습니다. 나이와 직업과 외모의 구분이 삭제된 평범한 사람들, 좋은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으로 꽉 찬 텅 빈 공간은 그야말로 하나의 계곡을 이루어 거대한 물결이 되었습니다. 서양과 달리 광장이라는 중심을 가진 넓은 위요적 시민공간이 없는 우리나라는, 길이 사회적 공간이었는데, 이번의 촛불집회는 다른 길들로 이어지게 하는 길 공간이야말로 정치적으로 훨씬 더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생생히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모종의 때에 계곡에 흐르는 거대한 물처럼, 물살처럼, 정치적 위기의 순간에 정치적으로 가장 낮은 시민(데모스)들이 정치의 극점인 청와대를 응시하며 빈틈없이 모여 거대한 변화의 강을 만들어낸 감동적인 풍경은 그야말로 최고수준의 행위예술이자 정치예술입니다. 공간은 그렇게 사람들로써만 그때까지는 결코 나타날 수 없는 현존성을 드러냅니다.


Q ∥ 영상매체, 인터넷, SNS의 발달로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소비주의에 물든 가벼운 이미지들과는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깊은 이미지’에 대해 논했는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깊은 이미지’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요? 떠오르는 몇몇 작품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나누어주셔도 좋겠습니다.
A   영국 BBC 방송이 선정한 21세기 기준으로 선정한 “위대한 영화 100선” 중 1위에 오른 <멀홀랜드 드라이브>(데이비드 린치 감독, 2001)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마음에 서성입니다. 주어진 의미들을 그저 즐김으로써 소멸되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우리가 의미를 찾고 만들어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분명히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Cafe Terrace At Night>(1888)는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신비합니다. 고흐는 렘브란트에 빠져 있었을 뿐 아니라 미세한 기독교 상징성의 양식도 부활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세상은 종교가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그 그림을 그런 관점에서 가만히 보면 그런 낌새가 여기저기 나타납니다. 어떤 이는 고흐가 이 작품 안에 <최후의 만찬>을 그려 넣었다고도 얘기합니다. 물론 그것 이외에도 많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니, 깊은 이미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공간과 시간을 붕괴하고자 한 건축가 존 헤이덕의 작품들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동물을 연상시키는 <Studio for a Musician>, 사람의 얼굴 이미지를 띤 <Casa del Poeta>, 가면극의 극중 인물로 등장하는 여러 건물들은 볼수록 흥미롭고 신비합니다. 물론, 뛰어난 시인들의 시들 또한 깊은 이미지가 출현하도록 합니다.


Q ∥  『깊은 이미지』는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논한 미와 숭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여러 사상가 중에 특별히 칸트에게 영감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본문에서 소개한, “감히 우리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라”고 한 칸트의 언명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A   소위 압축적 현대화를 관통해온 우리나라는 계몽의 기획을 제대로 밟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비판적 이성이 개인적 차원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여전히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주의에 근거한 온정주의의 오랜 전통, 거기에 더해 서양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대세에 휩쓸려 섣불리 머리(이성)를 경원시하고 가슴(감정)을 내세웁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은 민주적 사회를 이루어내는 데 필수적인 합리적 의사소통 능력의 결핍이라는 큰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 살의 나이 차이가 정당성을 제공하는 권위주의는 수평적 대화를 막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사회를 불통과 불신의 대립의 장으로 쉽게 내몹니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마저 (특히 정치와 관련한 대화에서) 그리 만듭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목하 4차 기술혁명이 지구적 차원으로 우리를 엄습해오고, 다문화주의가 삶의 필연적 조건으로 출현하는 오늘날, 자유로운 창조적 개인의 출현은 얼마나 중요하고 절박한지요. 사정이 그러한데도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우리 아이들이 잠시나마 마음껏 놀지도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연습 한번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입니다.

칸트가 주창한 현대성의 기획의 언명인 ‘비판적 이성의 사용’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지의 문제를 다루면서 특히 칸트의 미학을 끌어들인 것은 그것이 능동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와 숭고의 현상을 규정적 판단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에 따른 사태, 다시 말해 일반성이 부재한 까닭에 우리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사태로 해명합니다. 비판적 이성의 능동성의 회복과 함양은,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도 그렇지만, 개별적 인간이 하나의 자율적 인격으로 실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Q
 
∥  ‘이종건의 생활+세계 짓기’ 시리즈, 『시적 공간』, 『살아 있는 시간』, 『깊은 이미지』를 펴내며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몇 마디 부탁드립니다.
A   우리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세 가지 힘은, 사랑하는 능력, 질문하는 능력, 그리고 선함을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능력입니다. 이것들과 맞물린 문학(예술)과 철학(과학)과 종교(윤리)는 우리가 하나의 온전한 인격으로 실존하는 데 필수적인 삼 요소입니다. 우리는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이나 자신의 사회적 위치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파편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삶의 시간이 길든 짧든 가진 돈이 적든 많든 가급적 틈틈이 일상의 습관적 시간과 공간과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잠재된 그 세 능력을 돌보고 키워감으로써 우리 자신의 삶을 가급적 온전히, 그러니까 가급적 아름답고 공정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셋 중 하나만 잘 살아도 참 좋겠습니다. 공정하게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과 진실하게 사는 것은 어쩌면 하나인지 모르니까요. 지금까지 살아보니, 그리 사는 일은 우리가 소유한 물질이나 명예에 그리 종속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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