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일기

책 밖에서 만난 작가┃<한국의 르네상스인 석주명>을 펴낸 윤용택 교수 인터뷰
등록일 : 2018-10-23
트위터로 공유하기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미투데이로 공유하기
 


Q  나비박사 석주명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초등 교과서에 실리고, 한국과학기술원 한림원에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으며, 한국조폐공사와 우정사업본부에서 그를 기념하는 메달과 우표를 발행했고, 그를 기리는 오페라까지도 공연되었습니다. 오늘날 석주명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제주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오랜 시간 석주명 선생을 연구해왔다는 이력이 조금은 독특합니다. 석주명 선생을 처음 만났던 그 시간을 다시 한번 회상해주신다면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1980년대 초반 대학생일 때 도서관에서 우연하게 석주명 제주도의 생명조사서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목도 희한하고 도표들이 많아서 그냥 스쳐지나갔습니다. 한참 후인 1990년대 초반 이병철의 석주명 평전을 접하고 드라마틱하고 치열한 삶에 감동되어 하룻밤에 다 읽었습니다. 그 후에 계간 과학사상》 편집주간을 하면서 그가 보통의 나비학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이병철 선생에게 석주명의 생애에 대한 원고 청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는 이과였는데 우연하게 철학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평소에도 자연과학자도 인문학을 알아야 하고, 인문학자도 자연과학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계간 과학사상》 일을 하면서 더욱 과학기술과 인문학이 만나야 된다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석주명은 해방직전 2년 남짓 서귀포에 있는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 근무하면서 제주도의 자연뿐만 아니라 인문사회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했습니다. 석주명을 좀더 들여다보니 그를 나비박사로만 묶어두기엔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인문, 사회, 자연 분야를 넘나들면서 지역, 민족, 세계를 아우르는 열린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의 삶과 사상을 세상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Q  석주명 선생은 처음에 식민지 조국의 부흥을 생각하여 낙농과 축산을 염두에 두면서 농학과에 진학하였다고 했는데, 이후 어떻게 나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요?

A  석주명 선생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학생, 교사, 학자로 살면서 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약소민족의 비운을 절감합니다. 하지만 서슬퍼런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을 거부할 정도로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 자연과학 분야, 특히 생물학 분야에서 ‘조선적 생물학’을 주창하면서 국학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런 그가 어릴 때부터 동물 키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하면서 조국의 부흥을 위해 낙농과 축산을 하겠다고 생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학생은 어떤 선생을 만나느냐가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좌우합니다. 석주명은 가고시마고농에서 당시 동물학, 곤충학, 양잠학의 대가인 오카지마(岡島銀次, 1875~1955) 교수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고등농림학교는 식량증산을 위해 설립되었고, 그를 위해서는 병충해에 대한 방제에 대한 연구가 필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곤충들은 대부분 나방과 나비들입니다. 오카지마를 비롯해서 당시 가고시마고농 교수들은 나방 전문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석주명의 졸업논문도 주제도 “사과 독나방의 사육 연구”였습니다.

가고시마고농을 졸업하여 귀국하는 석주명에게 오카지마 교수가 “다른 사람이 손대지 않은 조선 나비를 10년간 몰입해보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개성 송도고보 교사로 11년간 재직하면서 ‘나비’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개성에는 7과 132종의 다양한 나비가 있고, 당시 송도고보는 전국의 인재들이 몰려드는 명문학교여서 전국의 나비채집을 하는데 학생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요. 그런 점에서 석주명 선생이 나비박사로 되는데는 그 자신의 초인적인 성실성이 큰 몫을 했지만 행운도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그동안 나비박사로만 알려져 있던 석주명 선생이 ‘제주학의 선구자’이자 ‘에스페란토 운동가’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종횡무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분인 듯합니다. 이 부분들은 왜 잘 알려지지 못했을까요?

A  그동안 학계에서 석주명 선생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연구가 부족했던 게 사실입니다. 석주명은 이북출신인데다, 대학교수가 아닌 중등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그를 이을 학문적 제자가 없었고, 직계가족도 미국에 거주하는 외동따님 석윤희(1935~) 한 분밖에 없어서 그를 기릴 주체도 없었습니다. 누이동생 석주선(1911~1996)이 석주명의 유고집이 1968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했고, 1985년 석주명 평전이 나오면서 일반인들이 석주명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나비박사 석주명, 즉 세계적인 나비 수집가이자 나비학자라는 측면에서만 부각되었지요.

에스페란토와 관련해서는 1970년대 초반부터 한국에스페란토협회 차원에서 석주명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강연회를 하였고, 2005년에는 
나비박사 석주명 선생 문집을 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에스페란토에 관심 갖는 이들 많지 않은 편이라 일반인들이 에스페란토 운동가로서 석주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제주학의 선구자로서 석주명은 2000년부터 제주도에서 학술세미나가 줄기차게 이어졌고, 지금은 제주도에서 석주명 선생이 제주학의 선구자라는 것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습니다. 2003년에는 석주명선생기념비가 세워지고 2007년에는 석주명선생기념사업회가 창립되면서, 제주도에서 석주명 선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비박사’, ‘에스페란토운동가’, ‘제주학의 선구자’라는 석주명 선생의 이질적인 측면들이 부각되면서 일반인들이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소 혼란스런 상황입니다. 어느 한 분야의 전문성만을 높이 평가하는 우리나라 학문적 풍토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도 합니다.


Q  석주명 선생은 나비를 연구하면서 곤충학, 동물학, 자연과학, 인문사회과학 전반으로 관심사를 넓혀갔으며, 제주도 연구를 하면서, 나비연구를 통해 터득한 관점과 방법론을 제주도 방언연구나 인구조사에 활용했습니다. 은연중에 학문 융복합의 가능성을 스스로 시험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의 타고난 성정 덕분인가요, 아니면 혹시 그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스승들이 있어서였는지요? 오늘날의 학문풍토에서 어떤 점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A  석주명 선생은 서당과 보통학교를 다녔고, 비교적 현대적 시설이 갖춰진 송도고보와 가고시마고농에서 근대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본다면 전통학문에서 근대학문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교육을 받은 셈이지요. 당시는 학문 분화가 막 시작된 때라 그가 폭넓게 공부하면서도 깊게 파고드는 연구를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산 정약용 등과 같이 한 분야에 전문가이면서 여러 분야에도 깊은 지식을 가진 이른바 르네상스적 인물들이 더러 있었지요. 석주명 당시에도 미나가다(南方熊楠, 1867~1941)처럼 균류학자이면서 민속, 종교, 문화인류학 등에까지 여러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도 있었습니다.

석주명 선생은 가고시마고농 재학 당시에 일본과 대만 지역을 답사하면서 자연과학도로서 다양한 문화체험을 한 바 있고, 나비를 채집하면서 전국의 산하를 다니는 동안 자연식생이 달라지면 생활문화도 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특히 지역이 다르면 곤충과 방언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지역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나비를 연구하기 위해서 수십만 마리 나비를 직접 관찰하고, 우리의 고전들과 폭넓게 관련 문헌들을 읽었으며, 그렇게 습득한 지식을 가지고 우리나라 세계과학사이자 세계문화사라 할 수 있는 <한국본위 세계박물학연표>를 정리하여 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비연구를 하면서 체득한 귀납적 통계학적 방법을 제주방언 연구나 제주도 인구조사를 하는데도 그대로 활용하는데 이는 기성의 인문학자가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리 본다면 그의 통합적이고 융복합적 학문방법은 특정한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무한한 지적 호기심에서 더 깊고 넓게 공부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Q  윤 교수님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석주명 선생의 자료들을 모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석주명 선생의 탄생일이 1908년 11월 13일이 아니라, 10월 17일이라는 것도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밝혀냈습니다.

A  하나는 석주명 선생을 세계적인 나비학자 반열로 올려놓은 조선산 접류 총목록으로 알려진 영문으로 된 『A Synoni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를 확보하던 게 생각이 납니다. 이 책은 1940년에 500부만을 찍어내어서 좀처럼 보기 힘든 책입니다. 어느 날 인터넷을 뒤지다가 서울 어느 고서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 바로 다음날 상경하여 거금(?)을 주고 사면서 가슴 설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석주명이 일본의 나비학술잡지 《제피루스(Zephyrus)》를 일본의 가와조에(川副昭人, 1927~2014) 선생으로부터 받은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Zephyrus는일본 1929년 후쿠오카에서 창간된 일본의 나비학술지로 1941년 9권 3호까지 나온 후 태평양전쟁으로 휴간되었다가 1947년 9권 4호로 종간된 나비학술지로 석주명 선생이 발표했던 나비 관련 전체 학술논문 78편 가운데 15편이 실려 있고, 그 가운데는 1932년 발표한 최초의 그의 나비 학술논문을 비롯하여, 백두산 나비채집기, 조선 동북단지역 나비채집기, 제주도 나비채집기, 조선 동북지방 나비채집기, 관모연봉 나비채집기 등이 실려 있어서, 석주명에 대한 연구를 하는 데 필요한 결정적 자료입니다.

고교 교사였던 가와조에 선생은 일본의 저명한 생물학자인 시바타니(柴谷篤弘, 1920~2014)의 제자로 저명한 나비연구가입니다. 재일동포인 현선윤 교수로부터 고교 은사인 가와조에 선생이 《제피루스》를 소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연락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1995년 고베대지진때 모두 소실되었다는 대답을 듣고 망연자실하던 차에 그날 오후에 《제피루스》가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지만, 냉정을 되찾고 현 교수에게 일단 1936년 제주도에서 나비채집했던 기록인 ‘제주도산 접류채집기’를 복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며칠 후 복사본이 오자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가와조에 선생께 “석주명을 연구하려 해도 자료가 없고, 석주명기념관을 짓는다 해도 전시할 물품이 없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한 마디로 당신이 소장한 《제피루스》를 달라는 말이었는데, 하지만 일절 답이 없었습니다.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6개월 후에 일본으로부터 한 상자 분량의 묵직한 소포가 왔습니다. “돌아가신 석주명 선생도 이것들이 한국으로 가는 것을 기뻐하실 것 같다. 《제피루스》 전질을 소장하게 된 것은 스승인 시바타니 선생이 모아두라는 권유 때문이었다.”는 편지와 함께 《제피루스》 1929년 창간호부터 1941년 9권 2호까지 전질과 그의 저서인 일본나비도감과 영어로 쓰인 부전나비 관련 책을 보내온 것입니다. 시바타니 선생은 석주명 선생을 존경한 나머지 1942년에 네발나비과에 ‘석’자를 딴 세키오키아(seokia)라는 속(屬, Genus)를 설정하고 홍줄나비학명을 Seokia pratti로 헌정하였고, 1985년과 1987년에는 나비와 나방을 연구하는 인시학회 기관지인 
야도리가에 석주명의 생애에 대한 글을 게재한 바도 있습니다. 

가와조에 선생에게 “언젠가 석주명기념관이 지어진다면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기증품들을 기증하겠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에도 건강이 안 좋던 그는 2014년 11월 25일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석주명, 시바타니, 가와조에로 이어지는 인연이 참으로 기이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가와조에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Q  2018년 10월 12일에 석주명 선생 탄생 11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연구내용들이 오갔는지 궁금합니다.

A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석주명 선생의 논저와 유품들이 공개되었습니다. 우선 석주명이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면서 썼던 ‘사과 독나방 사육연구’라는 자필 논문 내용이 공개됐는데(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 거기에 석주명이 직접 그린 나방 그림도 들어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위당 정인보 선생이 석주명에게 선물한 두 수 한시가 번역되어 소개되었습니다(정민 한양대 교수). 하나는 『위당문록(爲堂文錄)』권2에 수록된 7언 50구 358자에 달하는 한시이고, 다른 하나는 석주명이 소장하던 일호 남계우의 <화접도> 10곡 병풍을 보고 정인보 선생이 ‘일호화접도행’이라는 7언 134구 947자의 한시로 석주명 선생에게 선물한 10곡 병풍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석주명의 ‘제주도총서’ 6권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평가도 있었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석주명의 나비채집기 5편이 번역 발표되었고, 석주명 선생의 유품과 관련 물품들의 수집, 보전 활용방안에 대해 발표되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다면요? 그는 정규대학이 아닌 고등농림학교를 나왔고, 대학교수가 아닌 중등교사였지만, 노력과 실력으로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습니다. 요즘 학력보다는 실력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그러한 실제 모델이 많지 않습니다. 석주명 선생이 어떤 모델이 되어주실 수 있을까요?

A  석주명 선생의 최종 학력이 고등농림학교 졸업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전문대 출신인 셈인데, 각고의 노력과 성실성으로 일본 제국대학 출신의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더 나아가 그들을 실력으로 눌렀습니다. 석주명 선생은 학력보다는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증해주었다는 점에서 우리 청소년과 교육자와 전문가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것입니다.

그는 인문, 사회, 자연 분야를 넘나들면서 연구했기 때문에, 자연과학자와 인문사회학자들이 동시에 흠모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석주명 선생에 대한 연구는 학문적으로 자연, 인문, 사회분야 학자들로 세분화된 우리 학계에서 소통을 이루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는 지역문화가 살아야 민족문화가 풍성해지고, 인류문화가 융성하려면 다양한 민족문화가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지역주의자이면서 민족주의자였고, 동시에 세계주의자였습니다. 그처럼 열린 사고를 하는 석주명 선생은 지역화와 세계화를 아우르면서 살아가야 하는 글로컬 시대에 걸맞은 모델입니다.

석주명 선생은 평양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중등교사로 있으면서 나비연구로 이름을 떨쳤고, 말년에는 제주도와 서울에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민족적으로 남북이 분단된 우리의 현실에서 남북한동포가 동시에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고, 그에 대한 연구는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화합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책소개 보러가기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