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일기

책 밖에서 만난 작가┃<소리와 그 소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를 펴낸 티베트학자 심혁주 인터뷰
등록일 :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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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만국립정치대학에서 티베트 조장(鳥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티베트의 죽음 이해』 『티베트의 활불(活佛)제도』 『조장(鳥葬)』 등의 티베트 관련 연구서적들을 펴낸 바 있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티베트를 주제로 하지만 이전 책들과는 결이 좀 달라 보입니다. ‘소리’ ‘귀’라는 키워드가 이 책을 끌고 가던데요. 이 책의 내용을 간략히 이야기해주신다면요?

A  안녕하세요. 티베트 공부하는 심혁주입니다. 이번 책은 결핍된 존재,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절박하고 아쉽고 부족하고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 내는 소리는 그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와는 다른 어떤 울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소리내어 우는 명(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그 이전의 책들이 건조한 학문적 글쓰기라면 이번 책은 그 이전의 책들을 일렬로 주욱 펼쳐서 그 속에 숨어 있던 약하고 결핍된 존재들의 소리들을 밖으로 끌어냈다고 할까요.


Q  또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는 티베트어 수업시간의 풍경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로 6개월간 책 한 권을 계속 암송만 하는지요? 암송, 낭송의 힘을 지금까지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A  중국 당(唐)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한유(韓愈)가 있습니다. 그는 친구 맹교(孟郊)가 50여 세에 처음 급제하여 지방관으로 먼 강남(江南)임지로 떠나면서 즐거워하지 않자 그를 위로하기 위해 글을 지었는데 그게 바로 그의 명문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입니다. 거기는 한유는 ‘모든 사물은 평정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될 때, 소리를 낸다.’고 말합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여서 감정이나 사유의 촉발로 마음의 평정함이 깨지면 그러니까 슬프거나 기쁘면 마음이 움직여 스스로 소리를 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노래(歌), 울음(哭), 소리(聲), 악(樂), 말(言), 글(文辭), 시(詩)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그것을 명(鳴)이라 했습니다.

저는 그때 티베트어 수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반복적인 리딩-암송-낭송 역시 어떤 명(鳴)의 모양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송맹동야서>의 첫 문장은 “대개 만물은 평정(平靜)을 얻지 못하면 그 소리를 내게 된다.”로 시작하는데 저 또한 당시 유학의 고단함으로 마음상태가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해서 티베트어 선생님의 수업독법(讀法)이 특별하기도 했지만 끝가지 수업을 따라간 이유가 어쩌면 저의 마음상태와 관련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 소리에 관한 책을 낸 이유 중 하나도 디지털 세상에서 저의 마음을 건드린 어떤 촉발점이 있었는데, 그게 저의 내면을 두들겨 입으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처음 배울 때는 문법이나 규칙보다 입에 올리고 혀의 근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기가 배밀이를 하다가 어느 날 기적처럼 첫걸음을 할 때, 그걸 부모들이 규칙이나 말로 설명해주어서 걷는 것은 아니죠. 사람마다 걷는 폼이 다른 이유도 정해진 하나의 메뉴얼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어나 문장을 반복적으로 리딩하면 자신만의 호홉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낭송-암송으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리딩의 힘은 몸의 기억인 것 같아요. 헬스장에서 몸의 주요 부위를 매일 같은 동작으로 단련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거죠. 바이올린, 수영, 미술, 자전거 등을 어렸을 때 배우다 그만두어도 훗날 금방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신경학적으로 말하면 어렸을 적 뇌의 신경통로에 그 길(바이올린, 수영, 자전거)을 이미 터놨기 때문에 나중에 시간이 흘러 그 길을 가려고 하면 처음 가는 길보다 훨씬 쉽게 가는 이치입니다. 실지로 피아노를 이미 배웠던 아이가 처음 배우는 바이올린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몸이 이미 그 길을 터 놓은거죠. 단순하지만 반복적인 소리는 몸의 기억을 유발합니다. 리딩-암송-낭송의 힘은 결국 몸에 자신만의 지문을 찍어놓는 것이죠.


Q  우리 현대인들은 ‘소리’가 자신들의 몸과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있다고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에 대해 들려주신다면요?

A  요즘 현대인들은 계절의 변화에 둔감합니다. 단지 ‘춥다’ 또는 ‘덥다’로 말할 뿐 변화하는 계절의 소리와 냄새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밖을 나가지도 않지만 밖에 있어도 도통 얼굴을 들어 무엇을 느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은 상상력을 발휘하기 힘듭니다.

인간은 섬세한 감수성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디테일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기계를 하루종일 쳐다보고 있으니 감수성을 발현하기 어렵고 결국 기계에 먹히는 꼴이 되죠. 사람들은 점점 빠른 속도와 가벼운 효율성으로 무장한 디지털에 포박되어 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나쁘니 버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대의 변화를 거부할 순 없죠. 대신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가? 그럼 그것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자 했습니다.


Q  1부는 소리의 친구로 살아가는 티베트 라마승의 이야기를 담았고, 2부에서는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고 있던 실화이자 상상인 이야기들을 담았습니다. 2부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 중 누가 가장 기억에 남고 애틋한가요?

A  음. 생각해보면 <곱사등이, 다와>와 <아빠의 울음> 편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생각납니다. 편집자께서는 어떠신가요? 책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들의 엔딩이 좀 비슷해요. 슬프고 안타깝죠. 결핍되고 불완전한 존재라 더 그랬을 겁니다. 풍요롭게 가진 사람들의 일상을 썼다면 저의 마음이 그렇게 일렁이지 않았을 것 같아요.

상상이자 실화라고 썼는데 제가 왜 그렇게 이야기를 끌고 나갔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쓰다보니 어느새 그 방향으로 갔는데 시간이 지나도 밝은 쪽으로 결말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어요. 인생이 사실 가차없고 가혹하잖아요. 곱사등이인 다와가 사슴을 만나는 장면과 사원의 숲속에서 사람 같은 새를 만나는 장면은 제가 쓰면서도 설레었고 아빠의 선물을 기다리던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소녀가 비 내리던 밤에 산을 오르던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길에서도 다리를 저는 개나 등에 털이 벗겨진 고양이에게 눈이 가닿듯이 결핍되고 불온한 생명의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내면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물론 99% 상상한 이야기입니다. 책을 통해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Q  티베트 현지와 특히 조장 의식에서 만난 사람들은 주로 죽음을 앞둔 생명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당장 나는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내가 그들을 마주할 때의 느낌은 어떠신지요?

A  솔직히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줌이 마려워지고 시신의 비릿한 냄새가 오는것 같습니다. 매일 시신과 해부사, 유족들과 시신을 먹는 독수리들을 보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고 덧붙일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데 결국에는 ‘나도 저렇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허리를 숙이고 토한 기억밖에 없는데 좀 지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른이 된다는 건, 아마도 죽음을 응시할 수 있는 마음 또는 죽어가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그건 싱싱하고 팔딱거리는 물고기만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 그러니까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죽어가는 작은 곤충에게도 자신의 시간을 내줄 수 있는 사람, 그게 바로 아이와 다른 어떤 성숙한 어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Q  앞으로 또 어떤 집필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다음 주제로 ‘냄새’라는 키워드를 잡아놓으셨던데요. 글쓰기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A  이번 책 <소리와 그 소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는 제가 구상하는 디지털 시대,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3부작 중 1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간과 이야기들을 티베트를 빌려 썼지만 그곳과 우리가 사는 이곳과 서로 다르지 않았고 생각합니다. 고원이건 평지건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모두 움직이고 나아가고 소리와 냄새를 발산합니다.

해서 제가 풀어낸 이야기들이 특별하다거나 티베트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소리 편에 이어 ‘냄새’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단 가제는 <보이지 않는 여행: 냄새와 그 냄새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정도가 될까요. 출판사가 지어준 이번 책 제목이 보면 볼수록 그럴듯해서 일단 이렇게 정해두고 쓰고 있습니다.

소리 편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생명의 본질을 ‘냄새’로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다만 소리 편과는 다르게 여러 명의 주인공이 아닌 한 명의 남자가 티베트 라싸로 여행을 가는 여정과 그 속에서 만난 타자와의 이야기가 될 겁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도 도착점은 결국 디지털 시대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에 대한 어떤 신호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글쓰기는 저에게 어떤 의식의 변화와 힘을 준다고 최근에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춘천이라는 나무와 호수가 있는 다소 차분한 공간으로 오고부터 저도 놀랄 정도로 다양한 책읽기와 걷기 그리고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두 권의 책 <스토너>와 <올리버 키터리지>를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아, 이게 글이구나! 이야기란 이런 거구나! 하며 먹먹해했는데 이 두 권의 책은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어쩌면 좀 결핍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부족하거나 결핍이 낭패감을 가져야 할 트라우마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훌륭한 글을 읽고 나면 학교를 빠져나와 산책을 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시간이 허락되면 제가 좋아하는 호수 주위를 오래도록 걷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런 충동은 하루 만에 없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제가 생각해도 엉뚱한 글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것도 재미있는 일이야. 하며 혼자 중얼거리고 한동안 그 엉뚱한 이야기를 잘도 씁니다.

저에게 글쓰기는 오래된 기억들을 조용히 직면하는 시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저에게도 하루는 특별한 일 없이 잘도 흘러갑니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책을 읽고 기억을 끌어올리고 상상을 하는 시간은 별로 특별하지 않은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행위에서 저는 간혹 작은 만족감을 느끼곤 하는데 이건 매일 가는 수영장에서 습관처럼 두 팔을 뻗어 자유영만 하다가 개구리형, 오리형, 수달형, 접영, 배영 등을 마음대로 하는 느낌과 같습니다. 딱히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걸 해보고 싶은 마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가라앉아 물을 먹거나 그런 나를 누가 빤히 쳐다보더라도 내가 원하는 그걸 하고 있다면 수영을 못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저의 글쓰기는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허공에다 발길질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합니다.


Q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면 들려주세요.

A  오늘날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놀라울 지경으로 발전해도 심지어 인간불멸의 알약이나 우주에 가서 사는 날이 올지라도 그것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탐닉하는 사람들과는 별개로 살 수 밖에 없는 평범하거나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티베트는 결핍된 공간입니다. 산소가 부족하고 먹을 것이 없고 연료가 다양하지 않은 하늘 아래 고원입니다. 그곳에 가면 결핍의 공간에서 결핍된 존재들이 어떻게 하루를 견디고 무엇을 믿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단, 눈으로 하는 관광이 아닌 소리와 냄새로 하는 감성의 여행이 되어야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무언가를 충분히 가진 존재보다 부족하고 결핍된 존재가 많습니다. 저는 결핍의 힘을 말하고 싶습니다. 결핍과 부족은 창피해하며 숨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당히 내놓을 때 그것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무기이자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과 폭력, 질투와 고독은 숨길수록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자신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글로 또는 음악이나 미술로 자신만큼 구체적으로 표현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마음을 표현함에 있어서 구체성과 정직성은 최고의 힘일 터인데, 그건 부족하거나 결핍된 사람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내면에 숨기고 사는가 아니면 표출하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꺼내어 능동적으로 구사할 때 힘이 되고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티베트에 관한 글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위축되지 말고 표현할 때 묘한 기쁨이 온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기쁨은 물질과 소유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유하거나 물질(권력)자랑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만이 가진 어떤 소리와 냄새를 배양할 수 있는지, 타인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소리와 냄새를 감촉(感觸)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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