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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 가는 길
등록일:2017-05-30, 조회수:185
이굴기의 1분 영상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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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동창생들인가. 울긋불긋한 일군의 등산객들로 조용하던 산속의 삼거리가 아연 시끌벅적해졌다. 저마다 차려입은 건장한 여심(女心)들도 화사한 꽃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꽃에 가까이 가려고 나무를 당기기도 하고, 꽃잎을 건드리기도 하고, 아예 꽃더미 속으로 들어가 팔과 가지를, 줄기와 다리를 섞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여기는 지리산 중턱.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이정표에 따르면, 세석대피소 0.5km/ 의신마을 8.6km / 청학동 9.5km / 거림 5.5km. 지리산 주능선에 거의 잇닿은 산중 삼거리인 1400고지 갈림길이다. 나는 거림 매표소에서 아침에 출발해서 꼬박 3시간 만에 이곳에 도착하였다.

목표한 세석산장이 지척이다. 등산객들은 모두 한숨을 돌리며 여유를 찾는 지점이다.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불룩한 배낭 속의 음식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 하루를 꼬박 바쳐서 도달한 높이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 끼의 거룩한 식사를 하는 것. 외부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두 발로 이곳에 도착했으니 누구나 그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하겠다.

하하호호후후흐흐히히. 꽃을 사이에 두고 한바탕 즐거운 사이를 자랑하던 이들이 삼거리를 빠져나가고 텅 빈 적막. 넘실대는 초록의 잎사귀를 건드리고 땅으로 떨어지는 햇살이 찰랑거린다. ㄹㄹㄹㅊㅊㅊㅍㅍㅍㅎㅎㅎ. 흥겨운 떨림에 몸이 달아 우는 새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진달래가 다녀간 지 이미 오래고 지금은 흐드러진 철쭉이 위용을 떨치는 계절. <산불조심> 현수막 옆으로 지리산에서 곰을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문이 적혀 있다. 쓰여 있기를, 1.멀리 곰이 있으면 조용히 피한다. 2. 갑자기 곰을 만나면 먹을 것을 주거나 사진 촬영을 하지 마세요, 등을 보이고 뛰지 마세요, 시선을 피하지 말고 뒷걸음질로 곰으로부터 멀어지세요.




그리고 곰이 공격해 올 때는 이렇게 하란다.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여 저항하십시오. 만약 드물기는 하지만 만약 당신의 체형보다 더 큰 곰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된다면 아래와 같이 당신의 급소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십시오. 그러면서 실제로 귀를 막고 엎드린 자세, 다리를 꼬부리고 사타구니를 보호하는 자세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혹, 실제로,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할까. 눈앞의 지리산에는 분명히 곰이 살고 있다. 그것도 여러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안내문에 펄럭이는 입 벌린 곰 그림을 여러 장 보았다. 예전 캄차카 꽃산행을 떠났을 때, 가이드가 들려준 무시무시한 곰의 습격 사건도 떠오르며 등골이 서늘해지려던 순간!

한 단어가 내 후들거리는 내 정신의 그것을 찔렀다. 하하호호후후흐흐히히. 좀전에 내 귀를 가득 채워준 여성들의 웃음소리도 떠올랐다. 그것은 당신의 몸에만 있는 게 아니다. 곰에게도 있다. 멧돼지에게도 그것은 있으니 그건 새끼이기도 하다. 멧돼지는 새끼만 건들지 않으면 사람을 조용히 피해 간다고 한다. 그것은 급소였다.

급소? 그건 몸에만 있는 게 아니다. 노래에도 있고 시에도 있고 우리의 삶에도 있는 것. 뿐인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지리산은 우리 국토의 한 급소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계절에 관계없이 이리도 산을 찾는 이들이 이리도 많은 것이다. 그들 중에는 다른 산이 아닌 오로지 지리산만을 흠모하고 동경해서 오직 지리산을 찾는다. 지리산에게는 지리산만의 그런 영험함이 있다.

그리고 지금 급소를 논하는 이 자리에서 어떻게 이것을 빼놓을 수 있겠는가. 진즉부터 이곳을 지켜보는 급소가 있으니 철쭉에 가득 달린 꽃이었다. 화사하게 공중을 수놓는 꽃, 접시같은 잎을 배경으로 더욱 도드라지게 화사한 꽃들, 해마가 어김없이 나무가 벌겋게 흥분하여 내놓는 꽃, 꽃, 꽃들, 나무의 성기들.

제자리에 붙박혀 이동하지 못하는 식물은 꽃가루받이를 위해 벌이나 곤충을 고용하였다. 저를 대신해서 멀리 떨어진 꽃과의 합방(合房)을 위한 중매쟁이로 이들을 불러 정신없이 꿀을 따게 한 뒤 슬쩍 꽃가루를 묻혀보내는 것이다. <욕망하는 식물>의 저자인 마이클 폴란은 이를 두고 ‘날아다니는 음경(flying penis)’이라고 재치 있게 표현하였다.

이런 사실을 유념해서 이 지리산 산중의 삼거리를 보면 그야말로 급소들이 붐비는 곳이다. 여고동창생의 웃음소리, 철쭉꽃의 풍성한 개화, 천왕봉과 촛대봉을 지나 세석평전을 휘감아 오는 바람. 그리고 짝을 유혹하는 듯 공중에서 미끄러지는 새소리를 따라 한 철쭉 꽃잎 속으로 들어가면 어김없이 급소를 찾아가는 곤충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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