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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와 호박과 오이의 관계
등록일:2017-07-19, 조회수:236
이굴기의 1분 영상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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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다. 어제는 비가 내렸다. 비의 밧줄을 타고 먼지도 가라앉았나. 전방이 깨끗하다. 모처럼 이른 출근길. 사무실에 들어가 전에 외이재 데크에 잠깐 섰다. 아무 일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다. 늘상 있는 그대로 몇 개의 화분과 쓰레기통, 말라죽은 나무가 도열해 있다. 너무 심심한 배치이다. 배수홈에서는 어제의 비가 똑,똑,똑 떨어진다. 옥상은 깊은 골짜기라도 되는가. 고여 있던 물이 낙수되어 흐르는 것.

사무실로 들어가려다가 흠칫 발길이 붙들렸다. 어디서 왔는가. 잠자리 몇 마리 비행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참 많이도 보았던 빨간 고추잠자리는 아니었다. 잠자리들 노는 모양새가 특이하다. 두 마리씩 짝을 지어 공중이 좁아라 횡행하고 있다. 짝짓기라도 하는가.

생태학 책에서 잠자리가 짝짓기 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잠자리는 길다란 몸통을 활처럼 구부렸다. 암수가 그렇게 둥그렇게 휘어지니 흡사 하트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사랑할 때면 이런 포즈로! 모범적인 체위를 시범이라도 보이듯 그렇게 우아하고, 특이하게. 이름이 잠자리라서 그런가. 이 곤충은 잠자리 기술도 그렇게 빼어난 듯.

모든 게 교과서대로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건 그렇게 여유 있고 느긋한 풍경은 아니었다. 수컷이 암컷의 뒤를 일방적으로 쫓아가는 형국이다. 용케 꼬리를 붙들고 몸을 접합시키고 나란히 비행한다. 유원지에서 청춘남녀가 이인승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나란히 달리는 형국을 떠오르게도 한다. 잠자리는 지금 싸우는가, 사랑하는가. 그건 나도 잘 모를 일이다.

혜원 신윤복은 달빛 아래 은밀한 만남을 즐기는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를 그리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양인심사 양인지(兩人心事 兩人知, 두 사람의 마음이야 두 사람이 알 테지). 달빛은 아니지만 햇빛이 뜨겁게 작렬하려는 때이다. 이 개방적인 사랑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사랑이 어디 잠자리이거나 사람만이 일이겠더냐.

간단한 간이 화분에는 호박과 오이가 자라고 있다. 큼지막한 호박꽃, 조그마한 오이꽃. 이 꽃들에도 암꽃과 수꽃이 있다. 며칠 전에 붕붕거리면 꽃을 은밀하게 드나들던 벌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들이 모종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호박과 오이는 진즉에 짝짓기를 끝냈는가 보다. 수꽃은 쓸모를 잃고 축축 늘어지거나 아래로 떨어졌고 암꽃 진 자리마다 열매, 다시 말해 호박과 오이가 쑥쑥 자라고 있지 않은가. 제자리에 앉아 사랑의 결실을 거느린 채, 잠자리의 잠자리를 구경하고 있는 호박과 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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