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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풍경 2
등록일:2018-06-22, 조회수:146
이굴기의 1분 영상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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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지나 경부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니 김천이다. 대전-진주 고속도로 생기기 전 고향인 거창으로 가려면 꼭 이 길을 택해야 했다. 갈림길에서 왼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접어드니 직지사 가는 길이다. 고향 쪽으로 가는 길을 오래 힘주어 바라보았다. 많은 추억이 일어났다.

처음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 무척 낯설다. 직지사 근처에 귀한 꽃이 있다 해서 찾아왔다. 대웅전이나 요사채를 버리고 등산로를 택했다. 불법이 승한 쪽을 잠깐 쳐다보았다. 불법은 저곳에만 갇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

약간 경사진 도로를 오르니 불한당 같은 표지판이 완강하게 이마를 때린다. “알림. 이곳은 수행 정진 도량이오니 사전승락 없이 외부인 출입을 일체 금합니다. 출입금지” 산 중턱에 있는 중암(中庵)에서 내건 것이다. 표지판 위로 부부 금슬을 상징하는 자귀나무가 출렁출렁 신록을 뽐내고 있다.

무엄하게도 금지구역을 출입했다. 가늠해보니 이 정도 거리는 수행정진에 전혀 방해될 것 같지가 아니했다. 우리가 찾는 꽃은 간판에서 몇 걸음 더 오른 곳에 있어야 했다. 때를 잘못 맞추었는가. 눈을 씻고 보아도 꽃은 흔적조차 없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내려가는 길. 구부정한 길을 돌아가니 복면한 괴한처럼 풀섶에 표지판이 다시 보인다. 터덜터덜 걸어갈 때는 무슨 뜻인지 불분명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앞에 쓰인 것과는 전혀 다른 문장을 지니고 있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지친 나그네에게 길은 멀어라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생사의 길은 멀고 길어라
--- 법구경


물론 오늘 여기에서 처음 보는 문장은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래 시간 전, 어디에선가 보고 가슴에 남긴 말이었다. 통도사 근처 어디 샘물가에서였던가. 아무튼 처음 본 그곳에서 아득히 먼 길을 돌고돌아 여기까지 왔다.

다시 걸었다. 올라올 때는 몰랐는데 불쑥 교통거울이 튀어나왔다. 삼거리라서 사고 예방을 위해 설치한 거울이었다. 그 거울 속에 거미줄에 멋모르고 까불던 곤충이 걸려들 듯 웬 띵띵한 사내가 척, 걸려들었다. 모자를 쓰고 카메라를 들고 불룩한 배를 안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의 모습은 조금 전의 모습들이다. 사물을 때리고 나간 빛 눈으로 집합해서 조립한 상(像)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늦은 모습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지금 저 거울에 비친 사내의 모습도 구성하자면 이렇다. 사내를 때리고 나간 빛이 속절없이 저 까마득한 우주 속으로 떠나다가 거울에 잠깐 포착된 것이다.

거울 속의 사내가 움직이려는 것보다 조금 먼저 아주 재빨리 거울 바깥의 그가 움직인다. 그는 거울 속을 힐껏 보고 다시 걷는다. 아주 짧은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그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사의 길은 멀고 길다지만 또 어쨌든 이렇게 요만큼 짧아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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