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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풍경 3
등록일:2018-08-16, 조회수:148
이굴기의 1분 영상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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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밖에 없는 백두의 봉우리.
지금 이 시각에는 바람소리와 인간의 숨소리가 일합을 겨루는 곳.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슴슴하게 섞여 있다.
희미하게 이름이 뒤섞여 몸을 바꾸는 것들도 있는 듯하다.

어디부터 저것인가
어디까지 그것인가

언제부터인지
나도 나인지가 불분명하다.

여기는 백두산 중에서도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이 지나간다.

한 걸음이라고 해 두자.
그 한 걸음만 옮기면 월북하는 셈이다.

그 한 걸음 사이는 어마어마한 거리이다.
그 짧은 거리 틈으로 얼마나 많은 모래가, 얼마나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가.

북한쪽에서 오는 빛이
5호경계비 뒤쪽 봉우리 사면을 비추었다.

금방 떠오를 것 같은 해는
좀체 정체를 드러내지 아니했다.

1초라고 해 두자.
그것만으로 충분히 짧은 시간이다.

그 1초는 아주 넓은 정적이다.
그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나의 생각은 달을 짚고 지구 바깥 몇 바퀴를 돌아다녔다.

멀리 어둠을 밀치고 해가 서서히 나타난다.
늘 보는 해였지만 제대로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는 해.

오늘의 첫 햇빛이 무대막 같은 산봉우리 사면을 휘감아 걷었다.
드디어 멀리 자암봉과 쌍무지개봉 사이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움푹 꺼진 천지로 내리닫는 급한 경사에 핀 바위구절초.
어쩌면 가장 먼저 햇살에 얼굴을 씻는 생명.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금 뒤켠에 있다가
바위구절초를 짚고 가는 햇살을 줍는 두메양귀비.

해가 뜨면서 세상은 밝아졌다지만
그만큼 세상은 엎질러진 물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태다.

어둠이 깨진 상태에서 고약한 땡볕에 시달려야 한다.
또 하루 견뎌야 할 걱정도 들이닥친다.

지금은 온순하기 짝이 없는 햇살이
금세 털이 빳빳한 짐승처럼 돌변해서 세상을 찔러댈 것이다,

‘중국’이라는 국경 경계비 뒤에는 ‘조선 1952’이라고 새겨져 있다. 어쩔 수 없는 동포애. 여기에서 출발하는 큰길로 지나가면 북한으로, 평양으로, 서울로, 종내에는 내 고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갈 수 없는 길. 아득히 시선이 끝나는 곳까지 주었던 눈길을 아쉽게 거두고 하산하는 길.

등에 업고 올랐던 동무들은 그 자리에 두고 내려왔다. 벌써 등을 지지는 따뜻한 햇살. 대피소에서 컵라면으로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텅빈 광장에서 햇빛을 쬐었다. 이 무량한 햇살은 천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엄한 백두산, 그 정통의 중앙에서 보낸 햇빛이라는 생각에 자꾸 손이 오므라졌다. 그냥 흘러 보내기가 아까웠던 것이다.

나의 생이 얼마나 남았을까.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천지의 밑둥을 부여잡는 날이 더 빠르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 속에 분명히 얻은 것이 있다. 나의 손은 구부러지기가 쉬웠으니 이렇게 햇빛을 어디에서고 움푹 퍼 담기 위함이었다. 주먹이 아니고 포클레인처럼 손가락을 그러쥐는 버릇 하나를 백두산 정상에서 늘그막에 하나 얻었다는 사실!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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