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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자리에서 풍장하고 있는 메뚜기
등록일:2018-08-30, 조회수:50
이굴기의 1분 영상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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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광활하다고 하자.

작은 몸이지만 이 자리가 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래도 이 광야에서 호령할 땐 그렇게 했었다.

나에게도 한 철이 있었다.
두해살이 너머도 있다지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티없는 공중에도 수상한 빗금은 있다.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인줄 알았는데
죽음으로 가는 계단이었다.

너무 일찍 찾아온 운명에 꽂혀 버둥거리는 건
죄 안면이 많은 친구들.

나를 노리는 게 어디 거미뿐이었을까.
용케 다 피하고
곰솔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았다.

도를 깨친다면
제자리에선들 못 죽을까.

슬퍼할 겨를이 없도록
돌아다녔지만
아직도 가지 못한 곳이 많다.

등잔 밑이 어둔 것처럼
제자리를 제대로 알기에도 생은 벅차고 짧다.

여기는 내가 죽는 자리.
이른바 풍장(風葬)하는 중이다.

뛰고 날아다닐 땐 바람에 업히기도 했다.
이제 제자리를 잡고 나니
그 바람이 나를 한겹한겹 떼내어 간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놀다가
이곳에서 죽는다.

*****

강원도 양양의 여운포 해변이다. 몇 해 전 사초과 식물 공부하러 왔다가, 인상적인 곳으로 점찍었다가 다시 왔다. 강원도 해변이면 벌거숭이 수영객들이 우글거리는 해수욕장만 생각했는데 의외의 장소가 숨어 있다. 희귀한 풀들도 많이 살고 있다. 때는 여름이라 단체로 놀러 왔는지 바로 가까이 모래밭에서 손뼉소리와 고함 소리, 꺄르르르 웃음소리가 무시로 들린다.

금방동사니 갯방동사니 알방동사니 벼룩아재비 백령풀 모기골 나도방동사니 병아리방동사니 모기방동사니 털부처꽃 바늘골 진땅고추풀 좀고추나물 개발나물 참통발 수크령 꼴하늘지기 하늘지기 세대가리 버들금불초 암하늘지기

혓바닥이 간지러워지는 사초과의 식물들을 호명하면서 공책에 필기를 했다.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이렇게 이름이라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간 내가 몰라서 그렇지 이 넓은 들판을 수놓는 저 식물들은 어제 저녁에 받은 밥상에 올랐던 쌀밥, 보리밥, 된장, 멸치, 고추장, 시금치, 콩나물, 돼지고기 등에 견줄 수도 있으리라.

괜히 흔감한 기분이 들어 자세를 바짝 낮추어 아래를 보다가 문득 큰형님처럼 서 있는 곰솔 가까이로 가는데 눈이 번쩍 뜨인다. 곰솔의 가는 잎사귀를 붙들고 있는 건 곤충이 아닌가. 영락없이 열반에 든 포즈로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내가 이름을 아는 건 메뚜기가 만만하니 그냥 메뚜기라고 하자. 이 벌판 이 광장이 다 메뚜기의 놀이터였다. 그의 일생의 대부분이 양양의 여운포를 바탕으로 엮어졌다. 이 습지를 건너 저 소나무 숲만 지나면 벌거숭이들이 장난치는 해수욕장. 얼마나 갇혀 살았으면 모래 한줌 바람 하나에 마음을 저리 여는가.

소나무 향기 가득하고 해풍이 영양가 있는 바람을 실어다 주었다. 그저 좋은 일만 있을 줄 았는데 곰솔 근처로 가면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바람이 밀어주는 대로 잘록한 곳으로 빠져들었다간 질긴 줄에 포박당한다. 그래도 메뚜기는 다행이었다.

메뚜기는 한철 잘 놀다 가는 모양새다. 통통한 허벅지에 상처 하나 없이 일생을 건사했다. 봄에서 여름까지 일생을 요약하여 집중해서 다 살았다. 내년은 내년의 일이다. 이렇게 근사하게 죽을 자리도 잘 보전했으니 다음 생에는 나라를 구할 지도 모를 일이겠다. 살아서 저렇게 죽을 자리도 점찍어 두었다가 그곳으로 갔으니 여한도 없으리라. 그래서 그런가. 죽은 뒷태가 깔끔하다.

곰솔 하나 붙들고 풍장하고 있는 메뚜기,
태어난 곳에서 살다가
살던 곳에서 죽은 메뚜기.

...... 비행기 한 대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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