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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나리
등록일:2016-07-21, 조회수:369
궁리의 꽃밭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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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멀리서 보면 작은 구멍에 불과하지만 그냥 눈감고 통과하기엔 억울하지 않을까. 무언가 수런거리는 예감이 고여 있는 곳이기에.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수렴한 뒤 어마어마한 세계를 확 펼쳐보일 것이라는 기대가 집약된 곳이기에. 그런 몇 개의 터널을 통과해서 강원도로 갔다. 강원도는 왜 강원도일까. 강릉과 원주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지만 그것으로는 미흡하다. 강원, 강의 원천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실제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는 모두 태백에 있지 않은가.

산이 높아 골짜기가 깊고 그래서 도로가 겹겹이 휘몰이 장단처럼 구부러지고 휘어지며 돌아드는 강원도. 아무래도 이곳 도로는 관절이 허약한가 보다. 이번 장마로 곳곳마다 패여나간 곳을 보수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남해로 가기 위해 경상도를 누비는 낙동강, 황해를 향해 서쪽으로 흘러가는 한강, 그리고 동해의 강릉으로 미끄러지는 오십천. 이 세 강을 뜻하는 삼수령(三水嶺)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느 한 길모퉁이를 돌아들 때 길가에서 눈에 확 띄는 꽃이 있다. 모모한 높은 산에 가서도 보기가 쉽지 않건만 이렇게 뜻밖의 장소에서 만날 줄이야.

솔나리였다. 오로지 하나의 줄기 끝에 여러 송이의 압도적인 꽃들을 터뜨린다. 씽씽 달리는 차들이 궁금한 듯 길안으로 궁금한 눈길을 던지는 솔나리. 오늘 내 앞에 들이닥친 솔나리는 무려 10개가 넘는 꽃을 달고 있는 것도 있다. 백합과의 나리는 얼굴이 닮은 사촌들이 많다. 말나리, 중나리, 하늘나리, 참나리, 땅나리 등등. 그중 솔나리는 솔잎처럼 가느다란 잎이 뿜어져나오는 분수처럼 달려 있는 게 특징이다. 그 잎들이 줄기의 하부에서 꽃들을 힘껏 응원하고 있는 듯해서 더욱 보기에 좋다.

해발 높은 길가에서 만난 솔나리. 같은 물, 같은 햇빛을 섭취했을 텐데도 운명이 다들 다르다. 이미 활짝 핀 것도 있지만 절정을 지난 듯 색감이 희미하게 총기를 잃은 것도 있다. 그중에서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이미 피어난 꽃들 위에 묵묵히 달려 있는 꽃봉오리였다. 세상을 향한 포부를 가득 담고 있는 꽃봉오리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오늘 내린 비가 밖에서 실컷 두드렸으니 내일이면 더욱 활짝 피어날 솔나리.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후기.

때맞추어 산에 가지만 맞추기보다는 어그러지기가 더 쉽다. 우리 사는 세상은 그런 곳이다. 무슨 연유로 그리 한지는 모르겠지만 잘되기 보다는 잘못되기가 훨씬 쉬운 법 아닌가. 솔나리는 웬만큼 산에 다니는 분들한테는 익숙하겠지만 나로서는 모처럼 보는 꽃. 백합과의 나리인 하늘말나리, 참나리, 말나리는 몇 번 보았지만 솔나리는 익숙한 처지가 아니었다.

두 해 전, 고향 근처인 덕유산에 갔을 땐 솔나리를 작정하고 보려고 했는데 엉뚱한 꽃들만 보고 정작 그 꽃은 아쉽게 보질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 솔나리는 나로서는 매우 긴급한 꽃!

땀을 뻘뻘 흘리며 산 정상에 가서야 보아야 할 꽃을--- 솔나리는 멸종위기2급의 아주 귀한 꽃이다---- 도로가에서 차문을 벌컥 열고 영접하자니 조금 미안한 느낌도 들었다. 이곳이 그만큼 높은 지대라서 그럴 법도 하겠지만 이런 사소한 사실에 강원도의 힘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솔나리는 이름 그대로 잎이 소나무의 잎인 솔잎 같다고 해서 그 이름을 얻었다. 위에 적은 대로 솔나리는 하나의 줄기에 여러 개의 꽃대를 달고 있다. 언제가 고향의 큰댁에서 이젠 용도를 잃고 쓸쓸히 나뒹구는 등잔을 가져왔다. 호롱과 양초를 꽂을 수 있도록 칸이 여러 층인 쇠등잔이다.

여러 꽃송이 달고 있는 솔나리를 보는데 내 사무실 한 귀퉁이에 서서 그 옛날 전기도 없던 어두컴컴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마구마구 불러일으키는 촉매역할을 하는 등잔 생각이 났다. 이미 피어 늙어가는 형님 꽃들의 어깨를 짚고 얼른 피기를 안달하는 꽃봉오리. 그 봉오리와 밤이 쳐들어오는 등잔 옆에서 꽁보리밥 퍼먹던 쪼무래기하고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병아리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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