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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꽃
등록일:2016-08-03, 조회수:407
궁리의 꽃밭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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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가 간혹 있다. 도심에서 묵은 일주일치의 찌든 냄새를 풍기며 산에 오르면 그런 나를 따돌리느라 그런지 주위는 고즈넉하고 저 멀리에서만 꿈결인 듯 매미소리가 실려올 때가. 지난 주 횡성 운무산에 오를 때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아침부터 소나기가 한 바탕 내렸다. 매미소리는 아주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돌연한 침묵만이 골짜기 입구를 감싸고 있었다.

이열치열의 효과는 컸다. 저만 시원한 이기적인 칸막이 냉장실을 떠나 후끈한 땡볕 속으로 몸을 실으니 마음이 먼저 가뿐해진다. 얼른 숲 그늘로 들어서니 그간 불어난 물소리가 귀를 씻어준다. 호젓한 오솔길 입구에서 아래를 보니 한창 물이 오른 녹색의 잎들 사이로 꽃 하나가 피어 있다. 갈 길이 멀어 슬쩍 외면하고 운무산의 꼭대기로 걸음을 재촉했다. 투박한 바위가 포진한 정상 부근은 만만한 산행이 아니었다. 그 아슬아슬한 틈 사이에서 솔나리, 병아리난초 등의 꽃들을 만났다.

내려오는 길. 오전에 잠깐 보았을 때의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오래된 질문처럼 서 있는 꽃이 있다. 올라갈 때 본 그 꽃, 동자꽃이었다. 이 꽃에는 아주 슬픈 전설이 있다. 깊은 산중 암자에 노스님과 동자가 살았다. 어느 겨울 스님이 탁발하러 마을에 내려온 사이 폭설이 내렸다. 어쩔 수 없어 서로가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눈이 녹은 뒤 암자로 가니 스님을 기다리며 암자 입구에 서 있는 채로 동자는 얼어죽어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동자를 묻어주니 그 자리에서 식물이 돋아났다. 못다 핀 아이의 얼굴처럼 주황색의 꽃도 피어났다. 이를 본 사람들이 동자꽃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

지금은 꽃들도 잠깐 쉬어가는 시기이다. 가을꽃에 대비해서 숲도 한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다. 이 즈음에 저라도 없다면 이 숲이 얼마나 적막할까. 기다림에 이골이 난 것처럼 곧은 자태와 맑은 표정으로 서 있는 꽃, 동자꽃. 높이도 보통 성인의 허리춤에 닿을락 말락, 꼭 동자의 키만큼이다. 좀전에 한바탕 내린 빗방울에 얼굴을 씻었나. 꽃 턱 아래로 동그랗게 맺히는 물방울 속에 무슨 답이 들어있을 것만 같은 동자꽃.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

-------경향신문 2016. 8.1일자.






후기

그저 입맛이나 다시며 소고기 타령이나 할 때 한 번씩 떠올려보기도 했던 강원도 횡성에 저런 운치 있는 이름의 산이 있을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은 자리를 딛고 산 입구에 도착하니 이런 팻말이 붙어 있다.

“운무산(980M). 노송과 암릉의 절묘한 조화. 항상 구름과 안개가 낀 것 같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 운무산은 독특하고 웅장한 암봉미와 아기자기한 능선을 갖춘 아름다운 산으로 특히 암릉과 소나무가 한데 어우러지고 높은 단애가 곳곳에 서 있어 계곡 조망이 좋은 곳이 많다. 그만큼 급경사 지역이 많고 쉬운 산행 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초보 산행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름이 독특하면 한글로 미루어 짐작한 뜻과 한자의 속뜻과 다른 경우가 많은데 운무는 그야말로 운무였다. 구름과 안개의 산. 맑은 날일지라도 이름이 주는 축축한 분위기에 압도당할 판인데 비도 맞춤하게 내리니 그야말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꽃산행이 아닐 수 없었다.

동자꽃 또한 이름에서 짐작하는 바 그대로 동자를 기리는 꽃이다. 전설을 고려하여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동자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자꽃은 이런 연유를 간직해서인지 꽃말이 기다림이라고 한다. 그 말뜻에도 부합하게 주로 산의 초입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무엇을 기다리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맑고 동그란 동자의 얼굴 같은 꽃을 보는데 한시 한편이 떠올랐다.

馬蹄踏水亂明霞 (마제답수난명하) 말발굽 물 밟으니 물에 비친 그림자 흐트러지고
醉袖迎風受洛花 (취수영풍수낙화) 취한 이 소맷자락에 바람따라 꽃잎 쌓이네
怪見溪童出門望 (괴견계동출문망) 개울가 동자 어찌 알고 문밖에서 날 기다리나
鵲聲先我到山家 (작성선아도산가) 까치가 먼저 와서 알렸던 게로군

---山家(원, 劉因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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