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초피나무
등록일:2016-09-13, 조회수:398
궁리의 꽃밭 - 이굴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미투데이로 공유하기
  

벌초의 계절이다. 벌초란 추석이 되기 전 조상의 산소에 자란 풀을 베고 묘 주위를 정리하는 세시풍속을 말한다. 웬만하면 80년을 거뜬히 사는 우리들에 비해 고작 한해 혹은 두해살이 풀들의 삶은 그 얼마나 치열하고 비약적인가. 해마다 찾아가면 그새 무덤을 뒤덮는 풀들의 폭풍성장이 놀랍기만 하다. 풀 하나 베는 것을 두고 군사용어로 적을 정벌하듯 벌초(伐草)라고 하는 건 이런 까닭인 것이다.

올해도 고향의 큰집은 형제들과 조카들을 비롯한 대규모 벌초단으로 북적거렸다. 밤늦도록 마당에 앉아 돼지고기를 구우며 한해의 안부를 주고받는 일가친척들. 다음 날 모두들 무성한 풀들과 씨름하면서도 가마솥에서 끓고 있을 어탕국수에 은근히 마음이 빼앗겼다. 모처럼 고향을 찾은 동생들을 위해 시골의 큰형님이 동네 앞개울에서 살이 통통히 오른 물고기를 미리 잡아 놓았던 것이다. 벌초하는 내내 형수님이 끓여 내는 어탕국수를 먹을 기대에 입맛을 다셨다.

고향의 별미라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게 먹는 어탕국수. 고향에 가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것을 입에 넣을 수 있는 그 어탕국수의 맛을 완성하는 향신료가 있다. 그것은 초피나무 열매가루이다. 쥐눈 같은 까만 열매를 제거하고 껍질을 그늘에 말린 뒤 빻으면 독특한 향을 낸다. 우리 고향에서는 제피가루라고도 하는 것. 나무를 의식하고 산으로 들어갔을 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향기만으로 알 수 있었던 나무가 바로 초피나무였다. 

벌초란 산소 주위의 풀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결국은 이름을 찾는 행위이기도 하겠다. 과연 예초기를 가지고 풀을 쓰러뜨리고 눈에 거슬리는 나무를 전지한 지 몇 분 만에 무덤이 제 모습을 찾았다. 무덤의 주인과 무덤을 세운 후손의 이름이 햇빛 아래 드러났다. 어느 산소 한 귀퉁이에는 나의 이름도 닳아지고 있었다. 벌초 마치고 땀 흘린 뒤 초피가루로 완성한 뜨거운 국물을 삼킬 때 내 몸을 통과해나간 물고기, 간밤에 구워먹은 돼지고기, 무덤의 상석에 새긴 이름들에 대해 한번 생각했다. 그리고 벌초하다가 벌에 쏘여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도 접하면서 복잡한 고속도로를 뚫고 서울로 귀가했다. 초피나무, 운향과의 낙엽관목.





후기. 

그 어린 시절에 오늘의 나를 어찌 상상이나 하였겠나. 그저 닥치는 대로 되는 대로 살아낸 것일 뿐이겠다. 오늘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살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시골에 살 때 심심찮게 했던 놀이 중의 하나가 물고기를 잡는 일이었다. 고기가 귀한 시절에 물고기는 훌륭한 반찬이었고, 국거리 재료였다. 지금 생각하면 물고기한테 참 못할 짓이지만 아무런 의식 없이 그렇게 물속을 노니는 물고기를 괴롭히며 죽였다. 그리고 배를 따서 솥으로 던져 어탕국수를 끓였던 것이다.

이제 고향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신세가 되었다. 늑대도 수구초심이라 했는데 인간으로 살면서 연중 가장 큰 행사 중의 하나가 추석 밑의 벌초다. 아주 예전에는 시골에 계시는 어른들이 도맡아 산소 관리를 하였더랬는데 언제부턴가 도회로 나간 이들도 모두 집결하는 집안의 빼놓을 수 없는 행사가 되었다. 별달리 먹을 것 없던 깡촌에서 어탕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어려서부터 혀에 익은 그 맛은 좀체 잊을 수가 벌초 때면 으레껏 마지막 점심은 어탕국수로 잔치를 벌인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큰집 마당에서 빙 둘러 앉아 고향의 별미를 먹은 뒤 붐비는 고속도로 사정을 고려해서 서둘러 고향을 떠났다. 형수님이 큰집 뒷마당에서 딴 초피나무 열매도 한 움큼 챙겼다. 고향인 거창에서 국도를 이용하다가 무주에서 대진고속도로에 들어선 뒤 인삼랜드 휴게소에 차를 대었다. 서둔다고 서둘렀지만 모두의 마음은 빤한 것, 대전을 지나고 천안쯤에서는 심각한 지체를 각오해야 한다. 그래도 고향은 좋다. 그곳을 다녀오는 이유라면 개고생을 해도 다 용서가 된다. 시원하게 처리하고 세면대에서 손을 닦는데 조금 전 고향의 큰집 마당에서 어탕국수를 두 그릇이나 뚝딱 해치운 사촌형이 했던 말이 떠올라 빙그레 웃었다. “야, 올라가다 고속도로 휴게실에 가면 오줌이 뿌옇겠네!” 

구절초
이전글
알며느리밥풀
다음글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