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호자나무의 빨간 열매
등록일:2013-06-12, 조회수:1805
이굴기의 1분 영상 - 이굴기
트위터로 공유하기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기 미투데이로 공유하기




대마도의 다테라 산을 오르는 길. 대마도는 섬이라도 인적이 드물어 원시림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요란한 등산객도 우리 같은 관광객들 뿐. 본토인들은 산에 오르는 이가 드물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숨을 고르기 위해 중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호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호자나무는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나무. 다 커도 50-60cm에 불과한 아주 작은 나무이다. 그래도 작은 가시가 촘촘히 나 있고 늙은 노송처럼 옆으로 벌어져 그 어떤 위엄을 풍기는 나무이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작은 호자나무는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뽐내며 있다.
 

 숨을 몰아쉬며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나의 눈에 호자나무의 빨간 열매가 들어왔다. 그 중에 하나는 누가 베어먹은 흔적이 뚜렷했다. 알겠다. 호자나무의 가시를 피해 빨간 열매를 어느 새가 부리로 쪼아먹은 것이었다.
 

 그 자국을 보면 어느 짐승의 짓은 아닌 것 같았다. 짐승의 입에 저리 정교한 것은 없다. 만약 짐승이라면 그 정도 작은 열매는 그냥 따먹었을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그것은 날카로운 새의 부리가 남긴 흔적이었다.
 

 사과 한 입 베어먹은 것 같은 호자나무 열매를 보는데 옛날 생각이 났다. 철없던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그냥 구경하는 것에 머물렀지만 형들은 꿩, 노루, 멧돼지 들을 잡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꿩을 잡는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고향인 거창읍의 화공약품 가게에 가서 어렵게 독극물인 청산가리(싸이나)를 구한다. 그땐 그게 가능했다. 그것을 흰 쌀처럼 잘게 나눈다. 그리고 찔레나무 가지를 열매가 달린 채 꺽는다. 반드시 빨간 열매여야 했다. 그 열매에서 씨를 파내고 싸이나를 넣는다. 그리고 껍질을 단단히 여민 뒤 군데군데 포인트를 정해 그 가지를 꽂아놓는다.
 

왜 꿩은 빨간 열매를 좋아했던고? 그것이 맛있는 열매인 줄로 알고 덥썩 물은 꿩은 얼마 날지를 못하고 숲속에서 헤매다가 죽는다. 싸이나를 삼키다가 타는 듯한 통증에 머리를 풀더미에 처박고 몸을 떨다가.
 

 덫을 놓은 우리는 그 독극물이 든 열매를 하나하나 점검해 나가다가 하나라도 없어진 것을 확인하면 그 주위를 온통 뒤진다. 꿩이 싸이나가 든 찔레나무 열매를 먹은 것이다. 우리는 야호! 쾌재를 부르면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가까운 곳 어딘가에 틀림없이 죽어있을 꿩의 시체를 찾아서.
 

 내가 무얼 알았겠는가. 그래도 희미한 기억으로 몇 장면이 남아 있다. 동네 뒷산에서 꿩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닌 기억, 그리고 어느 해 정말 운좋게 꿩 한 마리를 주워들고 산을 내려오던 기억. 그리고 그날 저녁 무를 넣고 끓인 꿩국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 그때 나는 모처럼 먹는 고깃국이라고 입안에서는 혀가 들썩거렸겠지! 숟가락에 번들거리는 한 방울의 기름도 모조리 남김없이 싹싹 핥았겠지!
 

 모른다고 다 용서가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용서가 안 되겠기에 호자나무 빨간 열매가 내 눈으로 들어왔을까. 그리고 이런 옛 기억을 끄집어내도록 만드는 것일까. 그래서 어떤 새 한 마리가 있어 열매는 홀랑 다 먹지 않은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흔적을 남겨서 그것을 보는 이로 하여금 옛날 기억의 흔적을 상기시켜 주는 것일까.
 

 호자나무는 ‘호랑이 발톱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나무’라는 뜻이라고 한다. 기억은 한번 박히면 좀처럼 빠지지 않는 호랑이 발톱 같은 성질을 가진다. 대마도 산행 중에 만난 호자나무의 빨간 열매. 어느 새가 쪼아놓은 그 열매를 보면서 철없던 그 옛날의 기억 한 자락이 떠올라 나의 얼굴을 제법 빨갛게 만들었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