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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술병
등록일:2013-08-27, 조회수:938
이굴기의 1분 영상 -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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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이는 저 병에 콜라가 들어 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독한 백주(白酒)가 들어 있었다. 물론 그 전에는 공장에서 주입된 청량음료가 들어 있었다. 말하자면 저 병은 며칠 만에 세 번의 변신을 거듭한 셈이다. 처음과 나중은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병의 생(生)이었다. 병은 지금 콜라의 전생이었던 백주의 삶이었을 때 나하고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다음은 그에 대한 짧막한 이야기이다.
 

 백령도는 흰 백(白), 깃털 령(翎)이다. 미국의 턱밑에 가시처럼 쿠바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에게 백령도는 턱은커녕 아예 코앞에 버티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 지정학적으로 볼 때 문외한의 눈에도 대단히 중요한 거점임에 틀림이 없었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하다지만 일반관광객들에게도 천연의 섬으로 각광을 받는 곳이라 말을 많이 들었다. 몇 년 전 여름 휴가를 백령도로 다녀온 편집위원 한 분은 최고의 해변으로 그곳 바다를 꼽기도 했다. 언젠가 한번 가보아야지 마음만 먹고 여러 해가 흘렀다. 그곳 말고도 가보아야 할 곳은 많고도 쌨다.
 

작년부터 아홉시 뉴스가 끝나고 일기예보를 할 때 꼭 챙겨보는 지점이 생겼다. 방송국에서는 그곳은 그리 큰 섬이 아닌데도 꼭 표시를 하였다. 그곳이 다름 아닌 바로 백령도였다. 까닭이 있다. 그곳과 같은 관할인 대청도의 어느 부대에 아들이 배치 받아 간 것이다. 그 해안가 어느 지점에서 눈을 부라리며 아들은 오늘도 보초를 서고 있을 것이었다. 내일의 날씨를 전해주는 아리따운 뉴스캐스터의 등 뒤로 소총을 든 채 서 있는 해병대 쫄병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 먼 서해의 섬으로 우편엽서만을 보내다가 드디어 나에게도 파도를 헤치고 불안을 돌파할 기회가 찾아왔다. 면회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면박. 이른바 면회 외박도 인원이 부족한 탓에 근무 여건을 고려해서 부대와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휴가를 겸해서 2박 3일간의 여정으로 백령도를 찾은 것이다. 고단한 바닷길. 배는 커서 다행이 별다른 멀미도 없이 항해를 계속했다.
 

 저곳이 인당수이겠지. <마린브릿지>호의 갑판에 나와 시퍼런 바다의 한 지점을 그렇게 지정하고 심청가의 범피중류 한 대목을 떠올렸다. 바다위를 미끄러지는 배의 꼬리에서 물보라가 휘몰이장단처럼 퍼저나와 가뭇없이 사라져갔다. 



 인천을 떠난 지 4시간 만에 멀리 거뭇한 섬들이 보였다. 소청도를 지나 드디어 대청도가 선명히 포착되었다. 배가 천천히 항구로 접안해 갈 때 부두에 점점이 박힌 것들이 점차 자동차, 파라솔, 박스, 가게간판의 모습으로 구별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갈매기같이 꾸물꾸물 하던 사물들이 점차 사람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하더니 그 중에 하나가 드디어 인간 자식의 꼴을 갖추더니, 드디어 내 아들의 모습으로, 내 눈으로 훌쩍 뛰어 들어왔다. 검게 탄 얼굴의 아들은 내가 탄 배로 손을 흔들며 씩씩하게 승선했다.

 
제 어미와 제 누이와의 상봉. 그렇게 보고 싶었을 텐데 정작 만나서는 멋쩍은 듯 그냥 웃기만 했다. 배가 르르르르 물 위를 지나가듯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꿈결 같은 2박 3일. 해병대 용어로 2.3초의 면박이 모두 지나가고 흘러갔다. 이제 아이는 군복으로 갈아입고 나도 긴 바지로 갈아입고 백령도를 떠날 준비를 했다. 그렇게 짐 정리를 할 때.
 

 하마터면 백주를 그냥 개숫대에 쏱아버릴 뻔 했다. 백령도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내가 고기를 챙길 때 나는 백주를 배낭에 넣었다. 아이와 함께 먹을 요량이었다. 나름 독주를 좋아하는 녀석이기에 이럴 때 쓰려고 지난 번 타클라마칸 사막 여행갔다 귀국할 때 사온 백주였다. 그렇게 어렵싸리 구해온 백주를 아이는 한 모금 홀짝거리기만 하고 고기만 부지런히 먹었다. 오랜 병영생활이 음주 문화를 바꾼 것인가. 맥주를 더 선호했다. 내가 마신다고 마셨지만 절반이나 남겼다. 그리고 물병 하나를 비우고 남은 백주를 따랐다.
 

 술꾼이라도 술과 물을 눈으로 구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술에 유감이 많은 아내는 냄새로 알아차렸더라면 일부러라도 쏱아버릴 태세였다. 그런 급박한 와중에 그 물병, 아니 술병은 극적으로 나의 눈에 띄었고 나는 그 술을 구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 마실 것도 아닌데 술병 마개를 돌렸다. 문득 순간적으로 생각 하나가 떠올랐던 것이다.
 

공간이 많이 빈 술병은 불면 소리가 제법 난다. 피리를 제법 부를 줄 아는 나는 주둥이에 입술을 대고 소리를 냈다. 찰랑찰랑 미끄러운 소리가 일어났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너와 헤어져 집에 가서 이 술을 마저 마시려고 한다. 집에 가서 술병을 따고 아들 생각하마. 이 병에 마지막 한 마디 집어넣어라.”
 

 아이는 마이크에 대고 말하듯 웃으면서 짧게 한 마디 했다.


“아빠. 사랑함미데이.”

“야. 엄마와 동생한테도!”

“...................”

 

아이는 정말로 쑥스러운지 빙그레 웃음을 여러 방울 술병 속으로 떨어뜨렸다. 나는 혹시라도 병안의 것들--- 사랑한다는 말, 빙그레 웃음 그리고 알콜 분자---이 달아나갈까 싶어 재빨리 뚜껑을 닫았다. 정말로 꼭꼭 닫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왔다. 늦은 밤이었다. 냄새나는 빨랫감만 부려놓고 재빨리 술병을 찾았다. 떠날 때 물어보니 아들은 오늘 새벽에 근무가 있다고 했다. 내가 쿨쿨 잘 때 아이는 보초를 설 것이었다. 훤한 달이 우리 부자를 매개해 준다고 하나 나에게서 끊어질 게 뻔했다.
 

 파도에 흔들릴 대로 흔들렸는지 주둥이에 손을 대자 백주의 알콜 기운이 제법 쎄게 새나오는 것 같았다.  이 혼탁한 수도권의 공기에 백령도산(産) 청정한 공기도 나와서 섞이는 것 같았다. 이 술병을 따면 무슨 소리가 나올까. 아이가 흘린 웃음 소리가 들릴까. 아이가 나에게 해 준 말이 그대로 따라 나올까. 나는 아주아주 천천히 마개를 돌렸다.


소나기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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